* 요새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인데 다들 몸조심하시고 빠른 날에 가라앉길 기원하겠습니다. 부디 재미있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한편, 시끌벅적한 곳과 달리 아직 이른 새벽처럼 고요하고 차가운 밤 거리에 걸어가는 행인들은 자신들의 솔직한 즐거움을 아끼지 않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서로를 직접 마주하고 보는 건 오랜만이기에 그동안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들일 산처럼 많았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다 꺼내지 않으면 죽을 이처럼 서둘러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때 내가 바닥에 물이 있는 거 보지 못해서 넘어질 뻔해서 옆 책장을 잡았다 말이야? 근데 이게 고정시키는 게 망가져서인지 오히려 나를 덮치려는 거야. 그래서 난 재빠르게 몸의 중심을 잡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어. 하마터면 시험도 못 보고 병원 신세를 지내게 될 줄 알았지만 내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그런 위험도 얼마든지 피했지. 어때? 나 대단하지 않아?”
* 너는 너무 과장한 이야기가 아니냐며 잠깐은 웃었다.
“진짜라니깐. 너도 그 날 도서관에서 새로 공사 중이었던 걸 보았잖아. 정말, 내 말을 왜 이렇게 믿지는 않는 건지.”
제 말을 믿어주지 않아 삐져버린 아이마냥 볼을 부풀어 콧소리를 내는 아스리엘을 바라보는 프리스크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그의 모습은 예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커졌지만, 그 속은 여전히 아이의 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밝은 모습을 보니 가슴 속이 끓는 것같이 즐거웠다. 이렇게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 너는 알겠으니 볼을 어서 넣으라고 말하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 됐어! 어차피 안 믿는 표정인 게 다 보여! 하여튼 간 남의 월등함을 인정하는 건 보기 힘들다니깐.”
일부러 자신을 빛내며 자랑하여 차마 오해를 받기 쉬워진 아스리엘이지만 그저 장난기가 발생함을 가장 잘 아는 친구가 있으니 그다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으흠! 여튼 여기 조금만 더 걸어가다가 울타리가 나올 거야. 거기 몰래 건너서 가면 금방 집에 도착하니까 어서 가자.”
여태 자기 자랑이 조금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하며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설치된 높은 울타리를 가리킨 그의 설명에 프리스크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 너는 함부로 남의 집에 넘어가면 실례가 아니지 않냐며 놀랬다.
“음... 확실히 그렇긴 한데.... 돌아서 가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울타리 집주인 분은 나하고 개인적으로 친한 분이라서 괜찮을 거야. 더구나 지금 주무시는 시간이니 조용히 넘어가면 문제는 없겠지. 그러니 어서 가자, 프리스크.”
걱정되는 친구를 진정시키고 먼저 시범을 보여주고자 울타리 앞까지 빠르게 달렸다. 그리고 손을 흔들어 자신을 똑바로 인식시키고 펄쩍 뛰어 울타리 너머로 들어갔다. 이를 지켜본 프리스크는 점점 걱정이 차올라 안색이 좋지 않았으나 일단 울타리 앞까지는 걸어갔다. 울타리가 어깨만큼이나 커 넘어가다가 넘어지거나 큰 소리가 날 만하였다.
“어서 와, 프리스크. 괜찮대두.”
소곤소곤 조심히 말하며 권유를 하는 그의 행동에 잠시 망설여 몸을 주춤여 고개를 양쪽으로 돌렸다. 설마 이것을 지켜보는 이가 있을까 확인한 것이었다. 거리에 자신들 외에 아무도 없자 프리스크는 한 번 숨을 삼키고 마음을 다 잡아 빠르게 울타리를 건넜다. 가벼운 몸으로 폴짝이니 그것을 본 아스리엘은 친구가 마치 토끼처럼 보였다고 착각했다. 하얀 토끼 귀에 꼬리와 수염이 달린 프리스크로 투영하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졌다.
제멋대로 망상이 떠오르니 고개를 피해 얼굴이 붉힌 것을 숨기며 아스리엘은 입을 열었다. 프리스크와 계속 마주치면 망상을 감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 어서 지나가자, 프리스크. 아저씨가 주무시더라고 혹시 우리 때문에 깨시면 안 되니까.....”
친구의 말에 프리스크는 아직도 남의 집 정원에 몰래 들어온 것으로 안색이 걱정으로 물든 채 그의 안내를 받았다. 어서 빨리 실례되는 일을 끝내고 싶었다. 둘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발소리도 죽여가며 이웃의 정원을 지나가던 찰나.
펄럭!
갑자기 정원 옆에 있는 집 창문 커튼이 옆으로 치워지는 소리가 들리자 둘은 숨이 머는 것 같이 크게 놀랐다. 설마 집주인이 깬 거 아닌지 해 서둘러 발을 움직이려 하지만, 이미 창문에서 저희들을 지켜보는 주인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을 노려보니 아스리엘은 땀을 흘리며 벅벅거린 채 말을 걸었다.
“아.. 아저씨?! 깨.... 깨셨어요? 아니, 그러니까 우린.... 조용히 지나가려 했는데....”
어두운 집안에서 자신들을 그저 조용히 노려보는 집주인을 바라보며 변명을 꺼내는 아스리엘은 난감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잠을 깨게 했다. 이건 누구나 다 짜증나는 일이기에 지금 그가 매우 화가 난 상태임을 짐작했다. 나중에 혼구녕을 내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사실 자신은 이미 몇 번 더 경험했기에 그다지 겁을 먹지 않았지만 프리스크가 문제였다. 프리스크가 괜히 자신을 따라 오는 바람에 곤란한 일을 겪게 했으니 자신이 어떻게든 집주인을 설득시켜야 했다.
“아.. 아저씨, 제가 잘못한 건 알고 있지만... 앤 제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까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되겠어요? 프리스크가 추울까 봐 여기 지나 저희 집으로 가는 건데.... 나중에 제가 혼날 테니 눈을 감아주시면.....?”
아스리엘은 뭔가 이상하게 느꼈다. 창문 커튼 틈 사이에 저들을 노려보는 집주인의 눈이 감지가 않았다. 불과 몇 초 사이이지만 적어도 10번은 눈 깜박거려야 하는데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더구나 눈빛도 역시 죽은 생선마냥 말라있는 것 같았다. 감정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아스리엘은 갑자기 이곳의 분위기가 이상해졌음을 느꼈다. 마치 초원에서 굶주린 사자에게 들킨 사냥감 같은 고양감이었다.
옆에 있던 프리스크도 뭔가 느낀 낌세였다. 아스리엘의 손을 꼭 잡아 경계하고 있었다. 침을 삼키며 다시 한 번 집주인에게 물어보는 아스리엘.
“아... 아저씨?”
그를 불러보지만 여전히 답이 없는 집주인. 하지만 갑자기 몸을 움직여 커튼 귀로 사라지고는 현관으로 걸어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덜컥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둘은 흠칫 놀랐다. 어두운 밤 고요하던 집 문이 열리는 건 공포 영화에 나올 만한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피부가 오싹해지는 둘은 조용히 열려진 문을 향해 지켜보았다. 혹시 오늘 할로윈이니 우리를 놀리려고 하는 게 아닌지 하여 흔들리고 있는 가슴을 부여 잡지만, 문에서 무언가가 굴러 나왔다.
문에서 굴러나온 그것은 천천히 어린 사냥감들을 향해 굴러가 발밑에 도달하였다. 신발에 부딪혔지만 굉장히 기분 나쁜 촉감의 무언가임을 알 수 있었다. 식은 고기가 뭉쳐놓은 촉감에 사람 머리만한 크기의 무언가를 자세히 쳐다보기 위해 둘은 유심히 그것을 쳐다보기 시작했고, 곧 식겁한 표정과 함께 외마디의 신음 소리도 꺼내는 데 얼마 거리지 않았다.
“히... 히잇!!”
어둠 속에서 관찰해도 둘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사람의 머리였다. 목에서 잘려 식어버린 진짜 사람의 목. 머리의 주인은 고통스럽게 죽어다는 걸 보여주는 듯 눈은 닫지 못하고 그대로 핏줄이 서 있었고, 비명을 지르기 일보 직전으로 입이 열려 있었다. 둘은 그것을 보고 놀라 뒷걸음질을 하다 문 쪽으로 돌아보니 어느새 차갑게 식은 피가 묻은 칼을 쥔 누군가가 나왔음을 보게 되었다.
“프.. 프리스크!! 어서 도망쳐!!”
아스리엘의 신호와 함께 둘은 바닥에서 붙어버린 발을 떼어내 바로 울타리로 뛰어갔다. 둘은 갑자기 일어난 일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저희는 그저 집에 가는 길이었고, 집주인은 지금 자야 할 시간일 텐데 지금 저렇게 차갑게 식은 채 참수당해 있었다. 가끔 들킨다면 혼나기도 하지만 그것도 평범한 일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근데 지금 그 일상의 범위에 벗어나 공포를 맛보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먼저 프리스크를 울타리에 내보내는 아스리엘은 고개를 돌려 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느새 자신과 가까운 거리까지 온 그를 보자 얼굴은 차가워져 비명보단 날카로운 침묵이 나오고 말았다. 죽은 고기가 아닌 살아있었던 고기를 썬 칼을 보자 온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그렇게 얼어붙은 아스리엘은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하고 떨기만 하자, 이에 보다 못 한 프리스크가 그의 어깨를 잡고 서둘러 잡아당겨 울타리를 넘게 하였다.
프리스크의 대처로 하마터면 머리가 썰린 뻔한 아스리엘은 바닥에 넘어져 엉덩방아를 찍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잡아당겨 거리를 벌이려는 친구의 생존 행위로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방금 머리가 반으로 썰릴 뻔했다. 죽을 뻔한 게 아니라 진짜 죽게 된 것이었다. 아스리엘은 잠시나마 참수된 머리를 보며 저건 혹시 장난감이 아닐까 하는데 진짜로 자신에게 칼을 휘둘렀다.
“하... 하마터면 진짜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죽음으로부터 구사일생한 아스리엘은 자신을 구해준 프리스크를 보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천천히 나오고 있는 눈물 때문인지 친구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구... 구해줘서 고마워, 프리스크... 덕분에 살았어....”
감사를 받은 프리스크는 지금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 넘어져 있는 그를 붙잡아 빠르게 일으켰다. 친구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서는 아스리엘은 거리가 벌어진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쩐지 뭔가 익숙하고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푸석하고 빛바랜 가면에 풀어헤친 머리카락 그리고 빛조차 보이지 않는 검은 눈동자.
아스리엘은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밤마다 자신을 노려보는 검은 눈동자에 두려워해 벌벌 떨며 횡설수설하는 아비의 말이 떠올랐다. 밤조차 별도 구름도 보이는 데 저 눈동자는 그런 것조차 보이지 않는 완전한 암흑이라고 말이다. 어둠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 빛이 자비롭게 보살피지 않는 곳의 지배자가 저를 노려보고 있다고.
“부.... 부기맨?”
아스리엘은 그 이름을 꺼내며 서서히 제 아비가 겪었던 그 공포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평범하고 절대 바뀌지 않을 일상이 끔찍하게 변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치도 못해 그 여파가 너무도 강했다. 저희들을 노려보는 ‘그’의 시선에 다리가 벌벌 떨어 걷는 것이 힘들어졌다. 사냥감이 포식자 앞에 도달할 때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지 아스리엘은 생각했다. 그러나 익숙할 수 없는 공포에 다시 이성을 잃어가는 아스리엘을 부축해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프리스크. 이대로 가만히 있다면 다신 숨을 쉬지 못한다는 것을 본능으로 움직여 행동하였다.
친구의 부축으로 제 의지 아니게 발을 움직여 도망치는 아스리엘은 여전히 석상마냥 고정되어 있는 ‘그’를 눈에서 떼지 못하였다. 오래 전, 제 아비가 아이의 첫 죽음으로 눈을 떼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이곳은 깊은 숲속에 자리 잡은 아스고어의 저택. 주변에 불빛이 없고 겉은 낡아 보였기에 마치 유령의 집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주변은 커다란 나무에 꽃들이 많이 피어있어 등불 마냥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달빛을 반사 시키고 있어 두려움을 말끔히 지우고 절로 감탄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두운 새벽 공기가 자장가를 부르고 등불의 빛을 가리는 이곳의 정적을 깨트리는 불한당들이 찾아오고 말았다.
사이렌이 울리는 경찰차와 어느 낡은 차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차 문이 열리며 집주인은 물론 얼굴색이 어두운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지금 막 병원에서 출발한 이들이었다. 아들의 실종과 함께 ‘그’의 귀환으로 인해 아내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특히 그중에서 그녀가 걱정돼 같이 따라온 친구들도 있었다. 토리엘은 지금 경찰들에게 아들의 소식이 오길 바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너무나도 간절하는지 눈빛이 매우 깊어지고 눈물로 젖어 있었다.
“자, 들어오시오. 밖은 차가우니 안에서 들어와 몸을 따뜻이 하시오.”
저택의 주인인 아스고어의 안내에 몇 명의 경찰들과 여성은 말없이 안으로 들어와 초대를 받았다. 그러자 집 안으로 들어오자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깥에도 보였지만, 집안 곳곳에도 감시 카메라가 서성거리고, 창문마다 두꺼운 철 판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철저히 방비가 되어있자 그의 사정을 알고 있는 이들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정말로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음을 새삼 깨달았다.
“차를 끓이고 올 테니 잠시 소파에 앉아 좀 쉬게. 여기까지 왔는데 피곤할 테니.”
말을 마치며 바로 주방으로 걸어가는 아스고어를 뒤로 그들 모두는 튼튼한 저택의 내부를 감상하며 눈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내부는 낡은 바깥보다 더 깔끔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막 새로 건설한 주택들보다 부럽지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토리엘은 옛 추억을 상기하면서 집안을 둘러 다녔다.
십수 년 전, 매일 여기서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함께 숨바꼭질을 하며 놀곤 했었다. 아들이 옷장이나 침대 밑에 숨어 남편의 탐색을 피해 다녔고, 만일 찾아내면 곧바로 다시 도망치면서 노는 일상이 반복되고 하였다. 그때의 그녀는 그 둘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곤 하였다. 가족이란 게 이렇게 좋다고 느낄 수 있을 때니깐.
매일 관리를 해 깨끗한 벽과 문을 살며시 만지며 돌아다니는 그녀는 한숨을 크게 내뱉으며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생각해냈더라면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 텐데 후회스러웠다. 얼굴빛이 더 어두워져 갈 때 이번에 계단이 눈에 보이자 주저없이 바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위층에는 자신과 그이의 합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이고 밤마다 함께 누워 자기 전 100초 동안 서로를 마주 보며 그대로 잠드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절대 질리지가 않았다. 한 번은 자다가 괴사하게 변해버린 머리를 누가 먼저 보고 나서 사진을 찍거나, 사인펜으로 얼굴을 낙서해버리는 둥 잠이 확 달아나 버리게끔 즐겁게 놀기도 했다. 한 번은 배개가 찢어져 깃털 투성이가 되면 서로 닭이라고 놀리며 아침을 보내었다. 하지만 자신이 집을 나가버린 이후로 다신 그 놀이를 하지도 못하고 그리우기만 하였다. 그래도 어쩌다 자신도 모르게 자고 일어나면 바로 사인펜을 찾아버리려는 행동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몸에서 여운이 남기도 하였다.
토리엘은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눈물이 흘리곤 했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반드시 그의 곁에 남을 것이다. 남아있을 줄 몰랐던 상처에 괴로워하는 남편을 떠나지 않고 반드시 지켜낼 것이다. 이건 이젠 단순한 다짐이 아닌 강박에 가까운 광기이기도 했다.
“토리엘? 당신 거기 있소?”
그의 부름에 토리엘은 손으로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빠르게 닦고 고개를 돌려 그의 부름에 답했다.
“네..... 지금 저 2층 합방에 있어요....”
그녀의 말에 아스고어는 손에 차가 담긴 쟁반을 집은 채 조심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컵이 흔들리는 소리에 토리엘은 다급히 계단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아 중심을 잡았다. 잘못하면 컵이 쏟을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손을 잡을 필요가 없었다. 쟁반을 집으면 그만이니까.
“토... 토리엘?”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자 아스고어는 얼굴이 붉어졌다. 거친 살이 덕지덕지 붙은 자신과 다르게 그녀의 손은 매우 부드러웠다. 의사 일에 고전할 지라도 아직도 그 부드러운 살결을 유지되어 있으니 비단 결을 만지는 바와 같았다. 아스고어는 잠시 옛 생각을 떠올렸다. 잠결에 일어나 엉망이 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에 느꼈던 아내의 손길이 지금도 머리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얼마나 다정하고 부드러운지 그 어느 것보다 남부럽지 않았었는데.
“....조심히 올라오세요, 당신. 컵을 쏟을 수도 있으니깐 중심을 잘 잡아야죠.”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아버려 놀란 그녀는 말을 다른 데로 돌려 어색한 분위기를 지우려고 했다. 아까 병원에서도 그 누구도 가까이 노는 것도 힘겨워 보여 손을 꼭 잡고 다른 이들에게 소개함으로서 겨우 흥겨운 분위기에 녹을 수 있었다. 안 본 사이에 많이 소심해진 그를 보며 안타까움에 물들어진 그녀는 멍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고생한 티가 나는 얼굴을 보면 볼수록 가슴이 미어졌다. 자신이 떠나지 않았다면, 조금만 더 이해를 했었더라면 그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하니 눈물을 안 참을 수 없었다.
“토,.. 토리엘?! 당신 왜 그러오?! 무슨 일이...”
자신을 보며 울기 시작한 아내의 모습에 크게 당황한 그는 접시를 계단 난간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왜 자신을 보며 우는지 이해를 못 한 그는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아직 찾지 못한 아들의 걱정과 지켜내지 못해 자신을 원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낙심한 그는 처음 망설이나 곧 두 팔로 그녀를 안아 진정시키며 용서를 구했다. 과연 자신이 그녀를 안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을 품은 채로 말이다.
“아스리엘은 무사할 것이오.... 내가 반드시 놈으로부터 지킬 테니.... 제발 울지 마시오... 다 내가... 제때 움직이지 못해서... 미안하오 토리엘... 미안하오...”
이번에도 자신 때문이라고 낙담하는 그의 용서에 그녀는 품에서 나와 그것을 부정했다.
“아니에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당신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지금도 그때도 당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자꾸 당신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제발 그렇게 스스로를 상처 주지 마세요 아스고어!!!”
큰소리로 부정하는 소리에 거실에 있는 모두도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는 차가 흔들릴 정도로 흠칫하였다. 여기 올 때까지 조용했던 그녀가 제일 목소리가 커지자 다들 눈을 껌벅거리며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토리엘 역시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뱉어버리니 바로 당황하는 눈빛을 꺼냈고, 그녀의 대답을 들은 아스고어도 역시 놀라 눈이 커졌다.
서로 놀라고 말아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밤 속의 부엉이처럼 멀뚱멀뚱 가만히 서 있기만 해 더더욱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말았다. 토리엘은 요새 자신이 제 감정에 민감해진 게 아닌지 하여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 모르지만, 아스고어는 그런 그녀를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쳐다보고는 바로 꼭 안았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꼭 안아버린 점에서 두 번 놀라 흠칫하지만, 아스고어는 작게 속삭였다.
“고맙소. 그렇게 얘기해줘서 고맙소, 토리엘....”
그녀가 자신을 위해 꺼낸 말로 이번에도 구원을 받은 것 같은 아스고어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다. 아침에도 이어 지금 아들이 위험해지는 순간에서 불안해지는 찰나에 안정감을 얻었다. 이것이 구원을 받았다는 감각임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아스고어의 포옹으로 토리엘은 급하게 뛰고 있었던 가슴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얼마 만에 안겨보는 그의 가슴은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 더 단단하고 튼튼하나 솜털처럼 부드러움이 더 강해져 있었다. 그녀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실종되어 피워오르던 불안감이 말끔히 씻어지는 기분에 한결 진정되었다. 그러나 지금 모든 불안도 공포도 녹아버려 사라지니 계속 이렇게만 있다면 좋았을 터였다.
지직!!
갑자기 기계가 이상이 생기는 소리에 아스고어는 귀를 기울여 밑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기계가 문제가 생겼는지 파악하고자 잠시 그녀를 품에서 꺼내고 계단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계단으로 내려가자 토리엘은 이제야 정신을 차려 구겨진 옷과 붉어진 얼굴을 진정하고자 숨을 고르고 있는데 밑에서 그의 고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정신을 어따 두고 다니는 가!!”
갑작스런 고함에 토리엘은 그 이유를 알고자 급하게 내려와 그를 찾아다녔다. 얼마 안가 주방에서 들리는 철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돌려 발걸음을 움직이니, 아스고어는 주방에 설치된 컴퓨터 본체를 확인해가고 있었다. 컴퓨터 본체는 그가 준 차에 젖어 있었고 그리고 그 차의 주인은 옆에서 어쩔 줄 모르며 가만히 있었다. 화면도 맛이 가버렸는지 깨져있었다. 본체가 고쳐지지 않자 아스고어는 바닥에 손을 강하게 내리치며 컴퓨터 고장의 원인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대체 눈을 어디 팔고 온 거요?!! 컴퓨터가 망가지면 바깥과 내부 카메라를 살펴볼 수 없을뿐더러 놈의 습격에 대비할 수 없게 되었잖소!! 경찰이라는 것이 왜 이리 허술한 거요!!”
그의 뜨거운 질타에 경찰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버벅거리고 있었다.
“그... 그게... 간식이 있나 해서 찾아보려다가.... 선반에 있는 총을 보고 놀란 바람에... 내려놨던 차를 치고 말았습니다... 죄... 죄송합니.”
“그게 변명이라고 꺼내는 건가!! 만약 ‘놈’이 나타나 여기 있는 모두를, 그리고 토리엘이 죽어버린다면 어쩔 텐가?!! 어쩔 거냐고!! 만약 그렇게 되어버린다면 내가 자네도 역시 죽여버릴 거요!! 내 하늘에게 맹세하겠소!!”
설득이 없는 변명에 더더욱 화가 난 아스고어는 지금 상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신참 경찰에게 나무라자, 토리엘은 달려와 그를 말리고 있었다.
“아스고어, 진정하세요. 그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여기에 경찰이 남아 지키기로 했으니 그가 온다고 해도 모두가 다치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 너무 화를 내지 말고 진정하세요. 오늘 여기에 있는 사람들 다 괜찮으니깐.”
성이 난 그를 꼭 안고 등을 두드리는 그녀의 위로에 불이나 다름없는 숨이 진정되어 가라앉고 있었다. 의외로 빠르게 진정되어가는 그를 한 번 보고 다음에 컴퓨터를 바라본 그녀는 여태 ‘그’와의 싸움을 얼마나 많이 상상해왔는지 짐작했다. 숲에 들어오면서 보이기 시작한 감시 카메라에 창문마다 설치되어있는 철문, 그리고 선반마다 고이 넣어둔 총까지. 이정도면 그녀는 언젠가 펼쳐질 그의 외로운 전투 준비 과정이 눈에서 다 보일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의외로 빠르게 분노를 씻어버리는 그의 모습을 본 토리엘은 놀라워했다. 예전까지만 해도 진정하려면 한참 멀었는데 최근에 보인 모습을 보면 금방 정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안도하였다. 어쩌면 자신이 곁에 있어줌으로서 그의 상태가 호전되어가는 것이 아닌지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에 떠나지 말았었다며, 용기를 내서 다가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자책을 하다 갑자기 밖에서 급하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가까이 있던 경찰이 달려가 문을 열자마자 무전기를 들고 있던 다른 경찰의 입에 희소식이 나왔다. 실종된 아들을 찾았다고.
어두운 밤공기에 사이렌을 퍼트리는 한 경찰차는 온 거리를 방황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안에는 물속의 먹이를 놓치지 않을 매의 눈빛을 지닌 여 경찰 언다인과 ‘그’의 담당과였던 의사 그리고 목격자 둘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까까지만 해도 둘 목격자의 말을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가 사라진지 불과 몇분 만에 그 집에서 멀어지는 건 물론 경찰들의 눈에서 벗어나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개미때 마냥 둘러쌓는데 옷가지조차 볼 수 없었다니, 말 그대로 신출귀몰(神出鬼沒)한 놈이었다.
그러나 방금 놈에게서 벗어나 거리를 돌아다니던 저에게 찾아온 두 대학생의 목격으로 아직 이 근처에 있음을 대략 알 수 있었다. 빨리 찾아간다면 놓치지는 않을 것을 예측했다.
“정말이냐? 놈을 이 근처에서 보았다고?”
“네, 이 근처에서 보았어요. 이웃 아저씨네 집에서 확실히 보았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하는 남자의 말에 기울인 언다인은 핸들을 꼭 잡으며 엑셀을 밟았다. 어떻게든 놈을 잡겠다는 의지를 태우며 옆길로 회전하였다. 그나저나 학교에서 사라졌던 아스고어의 아들을 이렇게 금방 만날 줄을 몰랐다. 병원에서 아들이 사라져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버린 의사의 광분으로 ‘놈’을 찾는 겸에 찾아다니던 중 만날 게 될 줄을 몰랐다. 그것도 ‘놈’을 만나고, ‘놈’을 잡으러 가는 사냥꾼에게 말이다.
생김새는 그와 똑같이 보여 든든해 보여도 아직 여린 면이 보이기도 해 과연 그의 아들이 맞는지가 조금 궁금해졌다. 하기사 ‘놈’을 눈앞에 보고 온 길인데 누구라도 여려지기에 마찬가지니 더 이상 관심사에 두지 않기로 했다.
‘놈’을 찾고자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찾아다니던 중 갑자기 조용히 있던 학생이 옆 창문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안 놀랄 수 없었다. 온 마을 곳곳에 경찰이 돌아다니는 데 겁도 없이 제 모습을 숨기지 않고 단단히 드러난 ‘놈’의 모습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주변을 보면 정말로 어둠이 그를 지켜주는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옆에 있는데도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 아닌지 하였다.
“찾았다!”
‘그’를 찾는 순간, 언다인은 바로 액셀을 밟아 ‘놈’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다들 꽉 잡아!!”
그녀의 돌발 행위에 의사는 놀랬다.
“지.. 지금 뭐하는 거요!”
무겁고 두터운 차가 빠르게 달리자 의사는 눈이 커져 그것을 만류하려 했다.
“멈추시오! 그를 쳐선 안 돼요!”
그러거나 말거나 언다인은 액샐을 더더욱 밟아 그에게로 돌진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었음에도 ‘그’는 나무처럼 고요히 서 있기만 하였고 그렇게 모두가 예상하다시피 당연한 결과가 생겼다.
쿵!!
튼튼한 벽이라도 금이 생기듯이 그도 역시 차에 부딪쳐 멀리 나자빠져도 자연스러웠다. 그가 쓰러지는 걸 본 언다인은 바로 차에서 내려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그에게 겨눴다. 확신하게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와 마찬가지로 의사도 역시 다급히 내리고, 이 둘을 지켜보는 학생들은 침을 삼키며 조용히 있었다.
의사는 정신을 잊은 ‘그’에게 다가가 손으로 맥박을 져보며 상태를 살펴보았다.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고 있소?”
“당연히 알고 있지!! 어서 비키지나 해!! 그 놈을 확실히 끝내버릴 거니까!!”
악몽을 끝내버리고자 방아쇠를 당기며 다가오는 언다인, 그리고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꺼내는 의사는 바로 몸을 돌려 그녀에게 휘둘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저한테 날아오고 있음을 본 그녀는 바로 뒷걸음질을 해 피하였다. 침착하게 피하면서 본 그것은 다름아닌 의사들이 주로 수술할 때 사용하는 메스였다. 날이 얼마나 날카로워 보이는지 보기만 해도 매섭게 느꼈다.
“당신 지금 뭐하는 거야!! 지금 당신이 경찰에게 칼을 휘둘렀어!! 단순히 미수로 끝나지 않을 거야!!”
이를 갈며 의사를 노려보는 언다인. 하지만 의사는 그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무어라 중얼거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짐승마냥 광분해있었고 숨도 거칠어지기도 했다. 갑자기 그가 왜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놀랐찌만 머리로 이해를 했던 그녀는 비록 미수이기는 해 발포할 수 있지만, 단순히 협박한 민간인에게 총을 겨눠는 건 제게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가 사격을 미루고 있는 걸 본 의사는 바로 달려들어 메스로 목을 찌르려 하니, 언다인은 이를 차며 총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바로 그 손을 잡고 그의 뒤로 꺾은 다음에 바닥으로 밀어 눕혀 빠르게 제압하였다. 완벽히 제압해 이제 구속을 하고 ‘그’의 마무리를 끝내려고 할 찰나.
푹!
옆구리에서 무언가 찌른 소리와 함께 집어넣고 있는 감각에 언다인은 서둘러 그에게서 떨어졌지만, 금세 몸이 움직이지 못해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딱딱히 굳은 눈으로 저를 찌른 무언가를 보기 위해 안간 힘을 주었다. 그것은 주사였다. 매우 작은 주사였기에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녀는 주사를 어서 빼보려 하나 약의 효과는 굉장히 빨랐다. 적은 양임에도 금방 이렇게 석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아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려 보지만, 이미 빠르게 돌아다니는 약을 이길 수 없었다. 얼굴에 식은 땀을 흘릴 정도로 힘을 주어도 결국 약을 이길 수 없었다. 의사는 그녀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에게로 기어갔다. 그는 계속해서 무어라 중얼거린 채 ‘그’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당신들은 이해 못해... 이 귀중한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실험을 해볼 수 있는... 그런 멋진 날을 기다렸는데....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드디어 왔는데....”
소곤소곤거리는 그의 말에 언다인은 역시 ‘그’가 어떻게 특수 제작된 수갑을 벗었는지, 병원에서 탈출할 수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를 돕는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탈출하기 쉽고 편하도록 이날을 준비해왔고, 저 미친 의사의 실험 의식이 모두를 죽게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언다인은 잠시 누군가가 생각났는지 힘겹게 차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차에 있던 둘 학생들이 내리고자 문을 잡아 당기지만 어린이 방지 설치 때문에 내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새 ‘그’ 끌고 온 의사가 차 문을 열어 집어넣고는 자신도 역시 운전석으로 탑승했다. 그리고 핸들을 잡고 액셀을 밟고 어딘가로 달려가는 것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뻔했다.
‘빨리.... 다른 녀석들한테 이 사실을 알려야....’
무전기를 꺼내 통신을 하려 해도 이미 움직일 수 없는 몸에 그녀는 그저 뿔이난 도깨비 석상처럼 가만히 있었다. 다시 몸이 풀려지는 순간에 의사 놈을 찢어발길 것을 상상하며 말이다.
시끄러운 엔진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지며 나아가는 차 안에서 아스리엘은 지금 불안전한 호흡을 내뿜으며 어찌할 줄 몰랐다. 마냥 옛 도시 괴담으로 관철해서 그 순간만 소름이 솟아올랐지만, 지금 그 실체가 자신들 옆에 정신을 잃고 있어 가히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스리엘은 지금 머릿속에 곧 자신이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가버려 어찌 둘 바를 모르나, 이를 눈치챈 프리스크는 그의 손을 꼭 잡으려 한 까닥 남은 이성을 붙잡아 두었다. 호랑이에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그런 강한 위로가 손에서 타고 오르니 아스리엘은 최소 기절까진 안 할 수 있었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차 바깥을 보았다. 눈에 익숙한 무들이 나무들이 보이자 바로 의사의 계략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제 부친이 평생을 두려워했던 ‘놈’을 지금 광기에 빠진 의사가 제 부친이 있는 집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것을.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대...체 뭘 알아내고자 이..런 짓을 꾸미는 거냐고요.”
숨이 차버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어도 진상을 알아내고 싶었던 아스리엘의 질타에 의사는 승쾌히 응답하렸는지 백미러에 눈을 돌려 뒤를 보았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여서인지 마치 소풍가는 아이로 착각할 뻔했다.
“그야 당연히 ‘부기맨’을 네 아비랑 만나게 하기 위해서지. ‘그’는 오랫동안 병원에서 가만히만 있었어. 그래서 ‘그’를 알아낼 수 없었지. 하지만 오늘 밤, 그걸 이행할 수 있는 날이 찾아왔어. 악마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거지.”
의사는 즐겁게 대답하며 제 진상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30년을 죽은 것처럼 있어도 결국 그에게도 하나의 본능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 그래, 그는 어쩌면 네 아비를 만나고 싶지 않을까 했어. 자신이 놓친 그 사냥감을 잡고 싶어했을지도 몰라. 자존심이 상한 사냥꾼으로 말이지.”
안내판이 보이자 바로 핸들을 옆으로 돌려 숲 깊숙이 들어가는 의사는 점점 목표 지점과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껴서인지 흥분되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다들 ‘그’를 죽이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어. 계속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안 하고 다들 악마라고 부르기만 했지. 난 그가 처음부터인지 아니면 무언가의 영향으로 변해버렸는지 알고 싶었어. 우리의 영역에 벗어나 버린 그 원인을 알아내고 싶었어. 분명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그는 전혀 말을 하지 않았어. 30년 동안 갇히면서 한 번은 탄식을 해볼만 한데 그는 그런 것도 없었지. 하지만 곧 열릴 게 될 많은 가능성을 얻게 되겠지. 그래, 이걸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의사는 한 번에 많은 대답을 꺼내서인지 숨이 가빴다. 누군가에게 제 진심을 토해내는 건 시원한 일이기에 자연스러운 본능이었기 그랬다. 하지만 기뻐하는 그와 달리 혐오스러운 감정이 풍부하게 자라기 시작한 둘은 그저 미치광이로 보이기만 했다. 악마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을 숭고하다고 말하는 그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이들이었다. 둘은 동시에 옆에 정신을 잊어 인형같이 누운 ‘그’를 보며 침을 삼켰다. 만약 ‘그’가 깨어난다면 분명 저희는 살아남지를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더구나 자신의 아버지 또한 살아남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프리스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 입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 너는 ‘그’가 아스리엘에게 무언가를 말했다고 대답하였다.
프리스크의 말에 의사는 깜짝 놀란 듯 브레이크를 밟아 급정지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그’가 입을 열었다 말이야?! 뭐라고 했는데?”
* 너는 자신들을 먼저 풀어준다면 알려주겠다고 회유하였다.
프리스크의 말에 가만히 듣던 아스리엘은 곧장 그 의도를 알아냈는지 본인도 역시 입을 열어 맞추기 시작했다.
“‘그’가 이웃집 아저씨를 죽이면서.... 절 보고 딱 한 마디를 했어요. 만약 저희 먼저 풀어주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자신들의 제안을 먼저 요구하는 둘의 회유에 의사는 그것보단 먼저 ‘그’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저희 먼저 풀어주면! 알려드리겠다고 했잖아요!! 차 잠금장치를 풀고 저희를 먼저 내리게 해주세요! 저희 내리기만 하지 바로 도망가지 않을게요. 이거 맹세할게요.”
겁을 먹은 주제에 제법 이성을 계속 유지하며 큰 고함을 지른 아스리엘의 기세에 프리스크와 의사는 잠시 할 말을 잊어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프리스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신용을 보일 만한 그런 얼굴을 하고 있기에 어쩌면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의사는 그의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곧 옆에 있는 잠금장치를 풀었다. 문에서 찰칵 소리와 함께 미리 손잡이를 잡아 살짝 문을 열어놓고는 아스리엘은 의사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절 보고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의사. 하지만 아스리엘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지금 잠들어있었던 ‘그’가 다시 일어서 자신들 모두 바라보고 있으니깐.
“젠장!”
욕설과 함께 문 열리는 소리가 과감히 울려펴지는 바와 동시 아스리엘은 프리스크의 손을 잡고 숲속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 고깃덩어리는 생존을 위해 이제 잠시 동안 머릿속 모든 걸 잊어버리고 달리는 데에만 집중해야만 했다.
“‘부기맨’.”
‘그’가 일어서자 의사는 바로 뭐라 설득하려 하기도 전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발로 그의 앞 좌석을 강하게 밟았다. 튼튼히 고정되었을 의자가 종이처럼 접히자 의사는 허리가 부러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그’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의자를 계속 차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 발길질에 마침내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의사는 더 큰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도 듣는 이가 없었다. 사냥꾼에게 잡힌 사냥감의 숙명이었다.
의사가 뼈가 부러진 통증으로 정신을 반쯤 잃어버리니, ‘그’는 차에서 내리곤 운전석 문을 열어 그를 꺼냈다. 그리고 그를 끌고 와 차에서 떨어트렸다. 의사는 부러진 허리가 땅에서 긁히니 더더욱 엄청난 고통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최소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를 볼 수 있는 깨끗한 정신은 남아있었다.
가면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공허했다. 정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사막처럼 말라보이고 한 줄기의 빛조차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텅 빈 그릇 그 자체였다. 최소 사이코패스에게도 무언가의 기질이나 목적이 있을 텐데 ‘그’의 행동이나 눈을 보면 그런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령 사형 선고를 받으면 잠깐이나마 반응이 보이는 만정 ‘그’는 그런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루함도 욕망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왜 그는 텅 비어있는 채로 태어난 건지, 그의 속에 과연 무언가가 있을지를 알아내고 싶었다. 그의 뒤트려버린 탐구욕이 의사로서의 선을 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자신을 그걸 알아낼 수 있을 능력은 없었고, 설령 자신의 선임이자 뛰어난 능력을 지닌 가스터 박사가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역시나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악마로만 여길 뿐이었다.
선임이 실패해버리고 이제 사형 선고를 받아 언젠가 집행 받을 날을 기다리며 방안에서만 구속되어 알아낼 방도를 찾을 수 없어 발만 구르다 다른 곳으로 이감하라는 보고를 받아 이를 기회로 여겼다. 그가 탈출할 수 있도록 수갑에 미리 수를 써놓고 경비원들에게 수면제를 탄 커피를 주어 언제든 기회를 찾게 하였다. 그렇게 ‘그’가 탈출해 병원에서 보이지 못한 반응을 확인하며 ‘그’를 알아낼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의사는 자신을 내려보는 ‘그’를 보았다. 분명 차에 부딪혀는 데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였다.
“....제발 뭐라도 얘기해보게.”
30년 내내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그의 목소리가 궁금하였다. 낮고 고요한 소리인지, 쇳처럼 날카로운 소리인지, 굳고 담담한 소리인지 의사는 알고 싶었다. 지금 ‘그’가 자신의 머리를 발로 밟아버리려고 있음에도 말이다.
찔걱!!
무언가 끄적하고 두툼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숲속을 건너 넓게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