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모든 것이 잠든 바깥을 유심히 보던 토리엘의 친구 파피루스는 갑자기 뭔가 발견한 듯 눈을 비비며 깜박거렸다. 눈을 비비고 다시 눈을 가늘게 떠 확인하고는 곁에 있던 경찰에게 알려주었다.
“녜...? 경찰 아저씨. 지금 저기 바깥에 경찰차가 온 것 같아요. 근데 달려오지 않고 그대로 멈췄네요.”
파피루스의 말에 두 경찰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쳐다보았다. 꽤 멀리 있지만 익숙한 빨간 불과 파란 불이 겹치면서 빛나자 그들은 동료 차임을 알 수 있었다.
“다들 여기에 꼼짝 말고 계세요. 저희가 잠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아마 아드님을 데려오는 것 같아요.”
경찰의 말에 내내 어두운 얼굴이었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은 물론 곧 만날 수 있을 안도에 계속 줄이고 있던 가슴이 다시 풀어져 시원하게 뚫린 것 같았다.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다는 느낌 때문인지 토리엘은 금세 다리에 긴장이 풀려 제자리에 넘어지려 하자 그 옆에 있던 아스고어가 부축하였다.
그는 힘이 빠진 그녀를 바라보며 걱정이 실린 눈빛을 띄며 상태를 물어보았다.
“괜찮소, 토리엘? 다리에 힘이 풀린 거요?”
“네... 다리가 힘이 좀 빠졌나 봐요. 문제 될 건 없으니 괜찮아요.”
“긴장이 풀려 힘이 빠지고 말았구려.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잠깐 침대에 누워있는 게 어떻소?”
그의 물음에 그녀는 눈을 마주 보고 살짝 입가를 올리며 무언으로 부축을 부탁했다. 원래 한쪽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려 본인의 다리로 걸어갈 생각이었던 토리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 아스고어가 자신의 다리와 등을 손으로 안아 훌쩍 들었기 때문이었다. 의외의 행동에 토리엘은 얼굴이 붉어졌고, 그들을 지켜보던 두형제들도 깜짝 놀랐지만 이내 작게 미소를 지어 작게 엄지를 딱 올렸다. 그녀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활들짝 놀라지만 이내 복도 안으로 들어가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토리엘은 자신을 공주처럼 안은 아스고어를 쳐다보았다. 그는 전혀 그녀의 부끄러움을 인식하지 못한 순진한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정말로 그는 토리엘의 안정이 걱정되기에 가장 편히 데려다 놓을 방법을 선택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살짝 긴장하고 말았는지 가슴이 쿵덕쿵덕 뛰고 있었다. 토리엘은 그의 가슴에 기대어 들을 수가 있었다. 자동차 엔진처럼 강하고 바람처럼 선명히 들려오는 소리가 마치 자장가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느 방 안에 도착한 아스고어는 발로 조심히 열려있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에는 각종 의료 도구나 선반에 약병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하지만 매번 환기를 시켜서 약냄새는 강하지 않았고 공기가 맑아 딱 쉬기에 좋은 곳이었다. 아스고어는 우선 그녀를 침대에 조심히 눕히고 선반으로 걸어가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토리엘의 기운을 회복시킬 약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가 약을 꺼내는 사이, 토리엘은 본래 창고였던 방 주변을 돌아보며 구경을 하던 중, 유독 눈에 제일 띄는 것들이 보였다. 자신과 아들의 사진이 걸린 액자. 행복했던 때가 찍혀진 추억의 사진.
그녀는 침대에 조심히 일어서 힘이 없는 발에 집중을 가해 액자의 앞까지 걸어가 손을 갖다 대었다. 사진 속의 자신들은 무엇 때문이지 꽤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전혀 생각나지 못하게 밝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사진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말린 꽃으로 끓인 차와 영양제 몇 개를 건네주려 다가온 아스고어가 옆에 서 있었다. 그도 역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사진에 시선을 돌리며, 그 속의 행복한 미소에 둘은 잠시 현 상황을 망각하고 집중했다.
이때는 왜 웃고 있었을려나? 아마 셋이서 산속에 있는 계곡에 눌러갔을 때려나? 이때 셋 다 더위에 지쳐 곧장 야영 준비를 하지 않고 바로 계곡가로 뛰어들어 신나게 헤엄치고 놀았을 것이었다. 나중에 저녁때에 미리 야영 준비를 마치지 못해 모기와의 사투를 벌이며 텐트를 겨우 설치하였고 때늦은 저녁식사를 먹었지만 그럼에도 어디 누구 불평하나 없이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했었다.
“....우리 이때 정말 즐겁게 놀았었죠...”
“그렇소.... 아스리엘이 무작정 물에 들어가는 거 보고 나도 당신도 이성을 잊고 바로 뛰어들었었소.”
“저도 기억나요. 이때 우리 모두 본능에 잡힌 야수처럼 앞일을 내버려 두고 놀아었는데.... 그 당시에 당신이나 아스리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죠.”
“더위 때문에 미쳤으니 당연한 거요. 정말이지 우린 셋 모두 더위에 약해서 탈이라 말이오.”
하나하나 책장의 책들을 골라 읽듯이 추억을 회상하며 무뚝뚝한 방을 따뜻이 데워놓았다. 방음도 설치되어있어 고요하지만 쪼르륵 강물 소리가 작지만 시원하게 들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다시 현재로 집중해야 했었다. 잠시 동안 감상에 빠졌던 토리엘은 곧 제 옆에 선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스고어.... 저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요...”
그녀의 부름에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고정하는 아스고어. 그녀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하자 뭔가 심각한 말을 하는 것 같아 살짝 겁이 나던 차에.
“녜? 경찰 아저씨가 다시 돌아왔네. 가서 마중 나가야겠다!”
친구의 소리에 엄중했던 분위기가 금방 다시 가라앉고 말았다. 오랫동안 해묽은 감정을 털어내기 딱 좋은 적기였지만, 친구의 우렁찬 소리가 무거운 분위기를 깔끔히 씻고 말았다.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우선 아들의 얼굴을 본 다음에 다시 시간을 잡아 이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아스고어가 그녀의 손을 잡아 밖을 못 나가게 했다.
“아스고어?”
갑작스레 제 손을 잡은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데, 그녀는 놀라고 말았다. 지금 그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겁이 난 얼굴이었다. 수 십년 전, 제가 떠나기 전에 보았던 공포에 잡힌 그 얼굴이었다.
“아스고어? 갑자기 왜 그러세?”
“나가면 안 되오.”
떨리는 목소리로 제지하는 그의 말을 이해 못 해 토리엘은 잠시 혼란스러운 눈빛을 맘껏 내뿜었다. 하지만 아스고어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다시 한 번 제 말을 반복하였다.
“나가면 안 되오. 여기... 여기에 가만히 있어야 하오. 뭔가.... 이상하오. ...왜 지금 그때의 감각이... 다시 기억하기 시작했소. 밖에... 밖에 나가면 안 되오.”
제 어깨를 붙잡아 겁에 질린 목소리를 내는 남편은 식은땀이 흘리기 시작하자, 곧 자신 역시 갑자기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단순히 흥분하거나 뛰어서 일어난 반동이 아닌 무언가에 겁에 질려 북처럼 쿵쿵 뛰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 못 해 질문을 하려다 갑자기 밖에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팝!! 안 돼!!”
한편, 밖에서 타이어가 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거실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던 두 형제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았다. 방금 나간 차가 다시 집 앞에 돌아오자 파피루스는 입을 열었다.
“녜헤? 경찰 아저씨가 다시 돌아왔네. 가서 마중 나가야겠다!”
친구를 위해 고생한 경찰들을 마중나가고자 파피루스는 현관문을 열고 그들을 반기려 하였다. 하지만 그가 나왔음에도 어째서인지 차에서 아무도 내리려 하지 않았다. 계속 시동만 키고 있는 채 가만히 정지하기만 하니, 파피루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가만히 있는 것인지 몰라 조금씩 차에 가까이 다가가 보는 파피루스를 유심히 보던 샌즈는 갑자기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껴 그를 만류하였다.
“팝. 거기서 멈춰.”
형의 만류에 파피루스는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공유하였다.
“다시 안으로 들어와. 뭔가 이상해.”
평소 자신의 날카로운 감을 자랑하는 그가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경고하자 파피루스 자신 역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뼈 곳곳에 느껴본 적이 없었던 따가운 오한에 떨리게 하는 지금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직감이 날카로운 형의 말대로 우선 다시 집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가 다른 경찰에게 연락을 주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천천히 다시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는 순간, 갑자기 자연스럽게 어둠 속에서 숨고 있었던 누군가가 파피루스의 목에 줄을 걸어 강하게 조르기 시작했다.
“팝!! 안 돼!!”
샌즈는 외마디의 비명을 질러 두 다리를 움직여 동생과 정체 모를 괴한에게 달렸다. 남들에 비해 가벼운 체중이라 그런지 빠르게 둘 앞에 도달하고 몸을 날렸다. 괴한에게 몸을 던지 매달린 샌즈는 곧장 그의 등뒤로 옮겨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하자 그의 체중이 뒤로 밀려나고 있음을 느꼈다. 잘하면 동생이 탈출할 기회를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체중이 뒤로 몰렸을 뿐 굳건히 서있자 샌즈는 궁지에 물린 듯 마음이 급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다간 동생이 목숨을 잃게 되니 어떻게든 떼어내야 했다. 자신이 어떤 위험이 있어도 구해내야 한다. 그렇기에 샌즈는 작은 마한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그의 목을 물더 뜯기 시작했다. 순수한 뼈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이빨이 살을 찢고 피를 토해내자 그제서야 괴한은 괴로운지 몸을 주춤거리며 중심을 잊어가자, 파피루스는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던 압박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껴 우선 자신의 발로 괴한의 발을 강하게 찼다. 중심을 잊은 그에겐 충분한 공격이었다.
발 위를 밟힌 괴한은 중심을 잡기 위해 그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의 힘을 풀어내자, 파피루스는 서둘러 그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생명을 구제하였다. 하지만 그를 잡아줄 손이 다시 자유로워져 곧바로 제 등 뒤에 매달린 쥐새끼에게 갔다 놓았다. 강하게 물고 있던 쥐는 미처 피하지도 못 하고 그대로 붙잡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밀가루 포대를 강하게 내리치는 것 같아 숨을 쉴 수가 없어진 샌즈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자비롭지 못해 쥐새끼의 발목을 강하게 밟아버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주변 숲속을 되풀이하는 바와 함께 샌즈는 쇠를 긁는 소리를 뱉어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작아 아무도 들을 수가 없었다.
“형!!”
형제가 공격을 받게 되자 크게 놀라고만 파피루스는 거친 숨을 마셔야 하는 몸을 다시 움직여 ‘그’를 밀쳐내려는 찰나, 갑자기 뒤에서 딱딱한 태엽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한마디의 소리대로 움직였다.
“엎드려!!!”
무림 영화에 나오는 사자후처럼 외친 아스고어가 어느새 총을 장전해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강가의 물결처럼 울려 퍼지면서 총탄은 공기를 날카롭게 찢어가며 어둠 속 괴한의 살결을 뚫고 지나갔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뼈를 뚫지 못하고 그저 관통하고 말았지만, 최소 총탄의 반동으로 몸이 주춤해 불쌍한 쥐새끼를 밟고 있던 발을 때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파피루스는 바로 자신의 어깨로 ‘그’를 밀쳐내고 서둘러 발목이 부러진 형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고어 역시 ‘그’를 붙잡긴 보단 부상자를 치료하는 것을 우선시해 다시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굳게 잠근 다음에 옆 창문들도 마저 철판을 내려 막아 놓았다. 남편이 방어를 준비하는 사이, 토리엘은 서둘러 방에서 가져온 부목과 구급상자를 챙겨 제 친구를 치료하는 데에 급조했다. 하지만 호전시키긴 보다 임시방편이라 서둘러 병원으로 가지 않으면 친구가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게 뻔해 그녀는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보려 하지만 차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 하고 토해내고 있었다.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보다 완치시키지 못 했다는 의사로서의 절망이 더 컸다.
그런데 주방에서 무언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곳에서 나온 아스고어는 토리엘와 파피루스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가까이서 보는 그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지만, 눈과 호흡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거기서 가만히 있기만 하면 그대로 놈이 덮치고 말 거요. 자리를 옮겨야 하오. 그놈이 모르는 곳에 그를 옮겨서 치료해야 하니 당신은 아까 방에서 필요한 약품을 가지고 오시오. 그리고 자네는 휴대전화를 챙겨 경찰과 구급차를 부르시오.”
그가 침착하게 각자 둘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바닥에 정신을 잊은 샌즈를 조심히 안아 주방으로 걸어갔다. 주방 한 가운데을 자리잡은 싱크대가 숨기고 있던 지하실로 내려가 부상자를 침대에 눕히고 옷장에 걸어갔다. 옷장 문을 열고 먼저 옷걸이에 걸어놓았던 총탄을 부착한 벨트를 꺼내 착용하고 광질이 나는 권총과 산탄총 그리고 조준경을 달은 소총을 어깨에 매달았다. 그는 싸울 준비를 끝냈다.
이제 다시 주방 위로 올라가 현관으로 가려는 차에 파피루스는 급하게 그를 말렸다.
“저기... 그.... 구급차하고 경찰이 오려면 시간이 걸린데요.... 여기가 꽤 외진 곳이다 보니 빨라도 30분은 소모된다고...”
파피루스의 말에 아스고어는 혀를 차며 주방에 설치된 컴퓨터에 눈을 돌렸다. 하지만 컴퓨터는 여전히 망가져 있어 커지기는커녕 작동이 되지 않자 난감해진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게 있다면 안이든 밖이든 ‘놈’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데 까마득히 배제되어 버리고 말아 오래 준비한 싸움에 결함이 생기고 말았다. 그럼에도 아스고어는 포기하지 않았다. 놈이 기다렸듯이 스스로도 역시 준비해왔다. 공포에 더 이상 젖지 않을 거다. 그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고 말 것이다.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에 그는 복도로 고개를 돌리니 아내가 어느새 필요한 약품과 치료 도구를 가방에 담고 나타났다. 그녀는 아직 지금의 상황에 진정이 되어있지 않는지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다들 저 지하에 내려가 몸을 숨기고 있소. 내가 놈을 끝장낼 때까진 절대 나오면 안 되오.”
둘에게 대피소를 알려준 아스고어는 현관문으로 걸어가자, 그 모습이 마치 죽으러 가는 것만 같아 놀란 표정을 지은 토리엘은 다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이대로 놓치면 그를 다시 못 볼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녀가 자신을 붙잡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경찰이 올 때까진 내가 밖에서 시간을 벌고 있겠소. 운이 좋으면 그놈이 내게 죽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 안전히 지하에 내려가 몸을 숨기고 있으시오.”
그의 선언에 토리엘은 심장이 쿵 내려지는 기분에 마음이 다급해지고 혀도 떨림이 멈추지 않아 더듬기 시작했다.
“무.. 무슨.. 무슨 소리에요!! 지금 밖...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고요. 나가버리면 죽는다고요!! 그 사람 같지도 않을 놈을 혼자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럴 거면 저도 나가래요! 같이 싸우면 승산이 더 있을지도 모른 일이잖아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토리엘!!! 싸워본 적이 없는 당신이 뭐 어떻게 해보겠다고!!! 그렇게 헛되이 목숨을 버릴 거요?! 그럼 혼자 남겨진 아스리엘은 어쩔 거요?! 당신은 그 아이를 위해 남아야 하오!!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말고 어서 안으로 내려가오. 놈은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소.”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인 거마냥 말하는 그의 태도에 토리엘은 가슴이 미어져 갔다. 끝이 없는 동굴에 빠져 걸어가 죽는 느낌이었다. 곧 있음 제 옆이 텅 비워지고 춥게 될 일이 벌어지게 되니 그녀는 이성을 유지할 일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설득시키기에 이미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다. 죽음으로 걸어가는 사랑을 막기에 자신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유혹시킬 그런 힘이 없었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 말하고 싶었던 것을 꺼내야 했다. 어쩌면 이게 최후의 방파제가 되어줄 것임을 믿고 있었다.
“아스고어, 잠시만요!! 난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어요!!”
“토리엘, 지금 시간이 없소. 놈이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내가 밖에서.”
“고리, 그러지 마요!! 제발 내 얘기를 들어줘요!!”
아내의 외침 속에 그립고 그린 애칭이 들려오자 아스고어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지금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전쟁터에 나가려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때 당신 곁에 떠나버려서 미안해요... 난 그때 오만했어요. 치료될 수 없는 상처가 없다고 자신하며 당신의 아픔을 너무 가볍게 보고 말았어요.... 결코 상처란 치료돼도 흉터는 남는 법인데..... 난 그 간단한 사실도 모르고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났어요.... 하지만 이제라도 당신하고 같이 있고 싶었어요.... 지금이라도 당신의 흉터를 치료하고 싶어요.... 그러니 제발 떠나지 마요..... 죽게 되어도 함께 있어줘요... 이번에 당신이 날 떠나지 말아줘요 제발....”
아내의 간절한 바람 속에 여태 깊은 후회와 어리석은 자신을 원망하는 감정을 글을 읽듯이 아스고어는 파악하면서도 크게 충격을 받았다. 설마 여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고 실망을 안겨주었는데 사과는 데려 자신이 받고 있었다. 이건 그에게 있어 머리에 망치로 과격한 충격이었다.
“...토리엘,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당신이 왜 사과하는 건데... 내가 잘못을 한 건데... 왜 당신이 사과를 하는 거냐고.... 내가.... 내가 못난 놈인데... 내가 해야할 사과를 당신이 왜 하는 거냐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간절한 아내의 바람과 사과에 결국 그도 역시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이 죽는 상황에 겁을 먹어도 최소 지키지 못했던 그때보다 내 사람들을 지켰다는 마음에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간절히 살고 싶었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자신을 붙잡는 이 사랑스러운 여인과 웃으면서 살고 싶었다. 그리고 토리엘은 그걸 더더욱 간절하게 만들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우리 아들에게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걸 두려워서 했던 거잖아요!! 무력했던 자신에 비해 일찍이 준비시켜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살아남을 수 있도록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랬던 거잖아요!! 그게 왜 못났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못났다면 그걸 못 알아본 저라 말이에요!!”
후회에 이어 자신에 대한 실망을 숨기지 않는 그녀의 외침은 참으로 처참하고 가여워 하늘조차 동정을 표할 정도였다. 죽음으로 걸어가려는 이를 어떻게든 막고자 하는 확고함이 있었다.
“제발 살아서 그걸 만회할... 기회를 주세요, 아스고어.... 내가... 당신의 아픔을 보살펴 줄 시간을 주세요.... 제발 날 떠나지 말아줘요...”
계속 듣고 있으면 강철의 벽도 녹이 들게 해 무너트리는 통곡에 아스고어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놈을 막서 싸울 의지만 자리 잡았지만 점차 아내와 함께하고픈 욕망이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흉노인 줄 알았는데 풍작이 되어버린 욕망이 더불어 그녀를 꼭 안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하였다. 그냥 이대로 같이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물을 볼수록 잊어선 안 될 때가 떠올렸다. 아내와 똑같이 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불쌍한 아이들. 지켜주지 못해 그걸 평생 못 박아 살아온 인생. 그리고 지금 숨어버린다면 또 다시 살아있는 동안 공포에 잡히고만 삶을 살 게 될 것을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아스고어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며 두손을 아내의 어깨에 올려 잡았다.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설득에 먹혔다는 생각에 기쁨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곧 실망이 아닌 실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토리엘.... 나를 생각해줘서 고맙소. 당신이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주고 지금 이 순간에도 행복함이 가득하게 만들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소. 하지만.... 난 싸워야 하오. 지금 여기서 도망친다면 우리 가족은 평생 공포에 젖어 살 게 될 것이고.... 오늘 이날을 후회할 수도 있소.”
“네? 하지만 아스고어!!”
“정말로 어쩔 수 없이 도망치는 것도 올바른 용기이고 누구도 그걸 탓하지는 않소. 하지만 후에 다쳐올 위험을 두고 가는 건 무지요. 토리엘, 난 죽으러 가는 건 아니오. 죽이러 가는 거지. 그러니 날 한 번만 믿어주시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리다.”
흔들리고 말았지만 굳건이 다시 일어선 보리처럼 마음을 다잡은 남편의 설득에 토리엘은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려 하였다. 하지만 아스고어는 이번에 확실하게 고쳐 먹어버렸다. 도망치는 건 그때 뿐이었고, 흔들리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굳게 먹었다.
“파피루스. 토리엘을 안으로 데려가 같이 숨고 있게. 경찰이 올 때까지 절대 밖에 나오면 안 되네.”
가만히 서 있던 그를 불러 아내를 안으로 데려갈 것을 부탁하자, 파피루스는 주춤거리며 망설이다 행동으로 나섰다. 친구가 자신을 지하 안으로 데리고 걸어가려 하자 토리엘은 광분해지기 시작했다.
“안돼!! 이거 놔요, 파피루스!! 제발 날 풀어줘요!! 아스고어, 제발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세요!! 날 떠나지 말아줘요!!! 차라리 저도 같이 싸울래요!! 혼자서 싸우느니 둘이라면 어쩌면!!”
쭉
최후에 이성을 놔버리고 남편을 붙잡으려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갑자기 과감한 키스를 나누기 시작한 아스고어. 그는 그것을 작별의 의미를 나누는 키스로 한 것이 아니었다. 아침에 직장에 가기 전에 받고 주는 사랑과 재회를 풍부히 담은 키스와 같았다. 입술과 입술이 강하게 겹치고 부드럽게 비비다가 서서히 혀로 감싸 맑은 액체로 젖히니, 흥분해버린 그녀를 힘 빠지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게 있어 긴 시간이었던 키스가 끝나자 곧 불타오르던 감정이 가라앉아 몸이 주저앉을 뻔하다 파피루스에게 부축을 받았다. 몇 십년 만에 키스를 나누었던 둘은 잠시 정적을 흐르고 말았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건 그이의 강한 의지를 증명한 순간이었다.
“다녀오리다, 토리. 내 반드시 해내고 오겠소.”
짧게 인사를 마치고 다시 몸을 돌려 현관문으로 걸어가는 아스고어를 보며 토리엘은 다시 한번 붙잡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동안은 눈을 감아 찌푸리며 그녀는 입을 열어 재회의 마디를 외쳤다.
“다녀오세요, 고리. 몸조심하세요.”
그녀의 인사에 아스고어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끄덕이며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그를 지켜보던 파피루스는 가슴속으로 무운을 비며 토리엘을 데리고 지하로 내려갔다. 토리엘은 자신이 계단 밑으로 내려가는 순간까지 현관 앞에 서 있는 남편을 눈에 때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를 절대 잊지 못하게 말이다.
여린 가지들이 잔뜩 달린 숲속을 거칠게 몰아 다니는 두 아이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모두 공포에 설려 있었으며 마치 무언가에 도망치려는 듯 뒤로 돌아보며 확인하였다. 보이지 않아도 언제든 옆에 나타나 자신들을 덮칠 것이라는 공포감에 폐가 찢어지듯이 아파도 참아야했다. 죽는 것보다 나았으니깐.
“헉... 헉헉! 어.. 어서 빨리 아빠한테 가야 해. 빨리 가지 않으면...”
염소 괴물 소년 아스리엘은 지금 곧 위기에 처하게 될 가족을 걱정하며 앞을 달리고 또 달렸다. 어쩌면 잡힐지도 모를 사냥감 주제에 타인 걱정을 하니 제 3자에게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 마치 공포 영화에 나오는 여유가 넘치는 조연으로 말이다.
* 너는 모두가 괜찮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며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하... 하지만 놈은 아빠 집 근처까지 와버렸어. 어쩌면 아빠에게 갔을지도 몰라...”
아스리엘은 프리스크의 위로가 와닿지 않는지 점점 겁에 질린 표정으로 변해가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부친의 공포를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바뀌지 않으리라는 일상이 뒤트릴 것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 배신감이 와 닿았다.
소년은 지금에서야 부친의 심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곧 죽을 것 같아 두려운데 그는 평생 이걸 느끼고 살아왔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웠는지 깨달았다.
“아빠....”
그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를 못 해 미안하고 얼굴을 볼 낙이 없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그저 수박 겉핥기만 하고 넘어가곤 했었다. 그때의 경험을 생각하지도 않고, 아픔을 깊이 공감하지 않은 채 살아온 삶이 부끄러웠다. 만약 그가 제 앞에 있다면 무릎을 꿇어 사죄하고 싶었다. 잘못했다며 울고 싶었다.
달리면서 울고 있는 그를 가만히 본 프리스크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 너는 뛰고 있는 다리를 멈추고 그를 다급히 불렀다.
프리스크가 자신을 부르자, 아스리엘은 곧 떨어질 것 같은 다리를 멈추고 거친 숨을 내 뱉으면서 고개를 돌리려다 곧 따뜻한 무언가에 안기고 말았다. 프리스크가 속으로 괴로워하는 아스리엘을 안은 것이었다. 후드가 땀에 젖어 있지만 그럼에도 전혀 찝찝한 기분은커녕 따뜻해지고 포근한 기분에 아픈 가슴이 다시 꿰매고 있었다.
아스리엘은 프리스크의 행동에 크게 당황하나 괴로움이 가라앉아 점차 곁에 있었던 공포를 잃어가고 있었다.
* 너는 당연히 직접 경험해볼 때까지 모를 수도 있는 거라며, 이제라도 공감하고 알아준다면 그건 정말 장하고 고마운 일임을 말했다.
프리스크는 어느새 자신의 후회를 꿰뚫어 보고 있음에 놀라 아스리엘은 얼굴이 붉게 물들어졌다. 역시 옛날과 변함이 없었다. 타인의 아픔을 금세 알아채고 그걸 다가와 위로해주는 따뜻함이 식지 않고 오히려 더더욱 빛나고 있었다. 지금이나 옛이나 변함이 없는 존경하고 사랑스러운 프리스크였다.
“....고마워, 프리스크. 정말 고마워.”
어서 도망가야 하는 처지임에도 멜로 드라마를 찍는 둘은 잠시 동안 서로를 꼭 다정히 안으며 위로하였다. 만약 이를 지켜보는 3자가 있다면 정말로 역정 내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아니,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잠깐은 둘이 그렇게 꼭 안다가 아스리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나무 안쪽에 익숙한 조각상 같은 것이 보였다. 하지만 멀쩡한 조각이 아닌 무언가로 망가진 흔적이 남은 형태가 눈에 익히자 그의 얼굴은 곧 활짝 빛나며 프리스크의 품에 나왔다.
“프리스크!! 잠깐 따라와 봐!! 저기... 저기 무언가가 있어! 아무래도 저거 설마!!”
그의 눈이 밝게 빛나면서 두터온 손으로 프리스크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프리스크는 갑자기 밝게 변한 그의 모습에 당황해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발이 넘어지지 않게 천천히 따라갔다. 몇 걸음에 나뭇가지를 파헤치고 지나가니 발에서 돌처럼 딱딱하지만 뭔가 재질이 다른 무언가가 가득한 곳에 도착한 둘은 각자 밝거나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긴 아빠가 사격을 연습하는 곳이야. 옛날에 나도 아빠한테 사격 연습을 받은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어. 여기가 있다는 건 근처에 아빠의 집이 있다는 뜻이야. 어서 가자, 프리스크!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아스리엘의 말에 프리스크는 곧 화색이 돌며 다시 그의 손을 잡고 안내를 받기 시작했다. 아스리엘은 생각했다. 만약 프리스크가 위로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보지 못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아찔했다. 친구가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큰 도움을 주었다.
소년은 여기까지 왔으니 곧 ‘그’에 대한 대책을 준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안심하였다. 아직 모든 게 끝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제발 시간에 맞춰 도착하길 바라며 둘은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잊어버리며 달려간다.
아내와 지인이 지하에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아스고어는 천천히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 등을 기대었다. 옆 창문에 걸어놓은 철판을 살짝 들어 올려 바깥을 확인하려는 아스고어는 차오르는 침을 삼켜가며 눈을 돌렸다. 천천히 텅 빈 앞마당을 살펴보며 ‘그’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려는 사냥꾼은 어둠조차도 보이지 않는 공허한 눈이 마주치면 움직이지 못할까 봐 긴장하였지만, 조용히 등에 메고 있었던 총을 꺼내며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대고 있었다.
그는 땀이 폭포같이 주륵주륵 흘려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도 여전히 바깥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막 문손잡이를 돌려 나가려는 순간, 뭔가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당에 있어야 하는 게 없었다. 분명 제 두 눈으로 마당을 채우고 있었던 경찰차를 보았음을 확신한데 지금 안개마냥 사라지고 없었다. 무언가가 기이하게 일그러지고 있는 기분에 아스고어는 곧 등을 시리게 하는 시선을 느꼈다.
창문 바깥 앞쪽 숲에 자신을 노려보는 불쾌함에 고개를 돌리는 찰나, 갑자기 풀 속에서 두 개의 광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연료를 태우는 엔진 소리를 뿜어대며 네 다리로 달리려 하자 아스고어는 욕설을 내뿜으며 자리를 피했다.
“이런 젠장!”
그가 바닥에 발을 떼어놓은 순간을 노려 만반의 준비를 기다린 사냥감은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별똥별처럼 달렸다. 그리고 곧 엄청난 충격음과 숲에 메아리가 퍼지고 있었다.
쿵!
목재와 벽돌이 우르륵 무너지는 소리가 지하에도 퍼지자 토리엘은 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확인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바로 계단으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다친 형을 돌보고 있었던 파피루스가 곧 자리에서 떠 그녀의 손을 잡고 제지하였다.
“놔요, 파피루스! 지금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지 알잖아요!”
광분해진 토리엘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스켈레톤들 중에 가장 완강한 사내이기에 그저 손에 잡힌 낙지마냥 날뛰고 있었다. 그녀의 심정과 마찬가지인 건 알지만, 위에 올라가봤자 살아있는 죽음에게 잡히는 것밖에 없을 것을 파피루스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믿어보기로 하고 토리엘은 막아내고 있었다.
한편, 황소같이 달려온 경찰차로 인해 벽이 무너져내려 온통 먼지와 목재가 흩어져있는 거실 한쪽에서 미약한 호흡을 뱉고 있는 아스고어가 있었다. 그는 급진하는 차를 피해 몸을 던졌지만, 벽이 무너져내리는 범위가 넓었기에 벽만이 아닌 위층도 가라앉고 말았다. 덕분에 단단한 벽돌 조각들이 그의 몸을 덮치고 말았고 지금은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사태가 불안할지라도 그는 눈을 돌려 주방 쪽 싱크대를 바라보았다. 분명 위층의 소리를 들었을 텐데 지켜야 할 이들이 나올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기 전에 어서 몸을 일으켜야 했다. 위에서 떨어진 벽돌들로 몸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그럭저럭 움직일 수는 있었다. 게다가 자신을 깔아놓은 벽돌도 얼마 되지 않기에 조금만 양옆으로 돌린다면 벗어날 수 있음을 느꼈다.
몸을 흔들고 있으니 벽돌에 쓸려 따가운 감각을 맛보고 있지만, 나중에 겪을지도 모를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속으로 최면을 걸며 천천히 일어서고 있던 차에.
철컥
차가 열리는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 들어가니, 아스고어는 주체할 수 없이 발광하는 심장을 느끼며 목을 돌렸다. 얼마 안 가 눈 안에 선명한 핏줄은 물론 위협이 드러나고 더 급히 몸을 내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이 더 빨랐다.
발걸음의 주인은 곧 벽돌에 깔린 아스고어를 내려다보았다. 그를 내려보는 눈빛은 어린 아이가 동물원을 관람하는 순수함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마침내 게임 혹은 문서 정리를 마쳐 만족감을 만끽하는 사내의 눈빛도 아니었다. 만족도 즐거움도 지루함도 보이지 않는 밤보다 더 어두운 그 눈은 제 발밑에 있는 놈을 바라보았다. 아스고어는 벽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흔들어가면서도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무서웠다. 30년 전에도 지금도 그의 눈을 보면 몸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천천히 늪 속에 가라앉아 익사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지켜야 할 이들이 있다. 이제야 서로의 마음을 토해내고 다시 옛날처럼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하찮은 자신을 존경하고 걱정해주는 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행복한 미소에 공포에 젖게 둘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는 공포를 쫓아내기 이를 갈며 놈의 눈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절대로 잡혀 먹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러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는 ‘그’는 천천히 발을 들어 아스고어를 깔아뭉갠 벽돌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발에 힘을 주어 벽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밀 포대기만큼이나 무거운 벽돌이 천근만근으로 무게가 강해지자 가슴에 강한 압박을 느낀 아스고어는 크게 한 번 피가 섞인 숨결을 토했다.
여태 몸을 단련해왔다고 모두에게 당당히 말할 정도로 자신 있었던 그라도 가슴뼈가 부러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계의 초바늘이 달칵거리며 흐르자 벽돌을 밟은 무게가 점점 무거워져 몸이 두부처럼 부서지는 것이 시간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걸 아스고어가 잘 알고 있었다.
‘움... 움직여야...’
어서 벽돌에서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계속 이렇게 벽돌에 깔려있으면 허무하게 또 소중한 이들이 두 번 다시 숨결을 마시지도 내뱉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의지를 다듬었다. 공포에 질려있는 게 아닌 지금 어쩌면 천우의 기회임을 여겼다. 지금 놈이 방심한 채 가까이 와 있으니 말이다.
아스고어는 천천히 벽돌에 깔린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놈’은 그저 자신이 벗어나고자 하는 단순한 발악이라 생각하는지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걸 방심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아스고어는 젖먹던 힘을 다해 손을 흔들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차를 피하기위해 몸을 던질 때까지만 해도 분명 제 손에 총을 쥐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근처에 분명히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 시간에 찾을 수 있는지 그건 도박이었다. 지금 가슴 위에 방금 전보다 더 강한 압박이 느껴지자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불과 몇십초 뿐임을.
아스고어는 초바늘이 하나하나 넘어가면서 무게가 점점 두터워짐을 느낄 때 흔들고 있던 팔에 힘을 더더욱 주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날카로운 벽돌 조각이 가슴을 뚫고 들어오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더불어 압사까지 더하고 있으니 조급해져 가고 있었다.
뾰족한 자갈에 찔려도 계속 손을 흔들어가며 역전을 노리려는 그는 곧 손가락 끝에 익숙한 감각을 느끼자 회심의 기쁨을 품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방심을 지니고 있으면 안 되었다. 앞으로 초바늘이 6번 움직이면 정말로 가슴뼈가 꿰뚫을 것이고 보기 흉할 정도로 압사당하고 말 것이다. 서둘러 손가락 끝으로 개머리판을 끌어당기며 손바닥에 놓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4번이 남았다.
‘그’는 그저 침묵이 거실 바닥에 나타난 벌레를 밟아버릴 것마냥 더 강하게 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조심히 끌고 있었던 산탄총 손잡이를 아스고어가 손에 꼭 쥐었다. 이제 2번 남았다. 앞으로 무게가 더 강하게 누르면 눈에서 ‘그’의 얼굴 이외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1번 남았다. ‘그’가 발에 힘을 주려는 순간에.
부스슥!
아스고어는 겨우 손에 쥐고 있었던 산탕총을 벽돌 무더기에서 꺼내 ‘그’에게 겨눴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의외로 방심이라는 걸 느끼는 모양인가 보지?”
두 어 마디를 하고 아스고어는 방아쇠를 당겼다. 엄청난 반동과 폭발 소리와 함께 핏물을 흐르는 고깃덩어리가 주변을 젖혔다. 흩어지는 산탄 공격을 피하고자 몸을 움직였지만, 결국 왼쪽 팔을 잃고 만 그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했다. 공격을 받은 ‘그’가 주춤거리자 겨우 움직이게 된 아스고어는 몸에 힘을 주어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너진 벽돌로 인해 옷이 산발이 되고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렸지만 ‘그’를 끝내기엔 충분한 힘은 있었다. ‘그’는 잘린 어깨를 잡으며 지혈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스고어는 희열을 느꼈다. 그때 겪었던 입장과 달라졌다. 다치거나 죽는 건 저희들인데 지금 다친 이는 오직 ‘그’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워도 피를 흘리며 주춤거리는 그 모습에 만족하였다.
“하.... 그 모습을 머릿속에서 얼마나 그려왔는지.... 네 녀석을 절대 모를 거야.”
그 고통스럽게 죽어간 아이들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스고어는 지금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그 날의 책임감이 가슴 속에 솟아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망가트린 분노와 복수보단 그 여린 미래들의 삶을 앗아가 버린 ‘그’에게 심판을 내리고 싶었다. 앞으로 얻을 행복을 누리지도 못 하고, 그들을 낫은 근원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에 해당한 심판을 내리고 싶었다.
“이제 그만 다 끝내자. 네놈은 너무 많은 목숨을 해쳐왔어.”
‘놈’이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총을 장전하고 겨누는 순간, 마치 하늘이 ‘그’에게 은혜를 내리는 바와 같이 둘 사이에 2층 벽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스고어는 잽싸게 뒷걸음을 해 피하였지만, 그 순간을 노려 ‘그’는 발을 움직여 2층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가 위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 아스고어도 서둘러 쫓고자 분발하였다. 계단 층마다 핏방울이 수두록 했다. 이걸 따라간다면 놈을 찾는 데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조심히 발을 움직여 계단 위로 올라간 아스고어. 핏자국이 오른쪽 복도에 이어졌지만 그는 무너진 왼쪽 방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혹시라도 ‘그’가 그곳에 숨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바닥이 다 꺼버렸으니 놈이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고 판단하고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복도 중앙까지 이어진 핏자국를 보고는 혀를 차 끊겨진 쪽부터 있는 방을 조례하듯이 들여다보았다.
첫 번째로 확인한 안방은 매번 자신이 정리하는 곳이니 깨끗하였다.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곳이기에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정리를 해왔다. 더구나 물건이나 가구 관리도 신경 써가며 정리를 마쳤기에 그 위치와 놓은 자세마저 외우고 있어 안에 누가 들어왔는지 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안방에 ‘그’가 없음을 확인한 그는 바로 바깥쪽 벽에 설치한 버튼을 눌렀다. 태엽이 감기는 소리와 와이어가 풀어지는 소리가 문 바깥과 안쪽 중간에서 울려 퍼지다가 창살이 벼락같이 내려왔다.
굳은 철로 만든 창살이 안방 문을 잠가버리고 미련없이 다른 방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해 작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옷장과 속옷, 세탁기 등으로 채워진 세탁실이었다. 아스고어는 달빛이 비치지 않는 구석을 유심히 살피고는 곧 옷장에 눈길을 돌려 총을 겨눴다.
사람 한둘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옷장. 아스고어는 괜히 대형 옷장을 크게 사왔다며 속으로 후회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 안을 확인하려면 문을 열어야 하는데 안에서 뛰쳐나와 덮칠 가능성도 없지 않기에 쉽사리 시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도구를 쓸 수 있는 인종이었다. 잔머리를 생각한 아스고어는 빨래를 걸어놓기 위해 설치한 빨랫대에 있는 막대를 꺼내 그 끝을 잡아 휘어놓은 다음에 문걸이에 갖다 놓았다.
막대에 걸린 옷장은 쉽게 열리기 시작하자 한손에 들고 있는 산탄총을 강하게 쥐는 아스고어. 절대 예전처럼 당하지는 않을 거라는 다짐을 또 다시 다짐하며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히 옷밖에 없었지만 아스고어는 안심할 수 없었다. 총구를 앞으로 찔러 넣으며 완전히 확인하였다. 고기를 누르는 감각이 없어 가슴 한편이 안심해하고 다시 복도로 돌아왔다.
창살이 부드럽게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 발걸음을 뗀 그는 한 번 숨을 들이 마시고 복도 끝방 앞까지 당도했다. 손잡이를 잡아 들어간 그곳은 오랫동안 사격 연습을 위해 쌓아놓았던 마네킹을 보관한 창고였다.
총탄에 부서진 마네킹은 창문에 들어오는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플라스틱 살결 위에 때 묻은 먼지가 쌓여있었다. 아스고어는 그 먼지들을 보며 지난 날을 떠올려 보았다.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게을리하지 않고 사격 연습을 해가며 이를 갈아왔었다. 그리고 오늘 그걸 풀어낼 때가 찾아오고 말았다.
달빛만으로 방안을 살펴볼 수가 없었던 아스고어는 산탄총에 장착했던 전등을 켜 꼼꼼히 살펴 보았다. 핏자국이 끊어진 복도에서 남은 방이 이곳이었다. 분명 ‘그’가 이곳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반드시 이곳에서 잡아야 한다. 이 생각밖에 들지 않는 그였다.
전등 빛으로 낯을 드러내는 마네킹을 한 번씩 슬쳐 보고 방구석으로 눈을 돌리려다 옆 벽에 있는 옷장 문에서 아주 익숙한 무언가가 묻혀있었다. 살아있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지니고 있는 붉은 빛 액체. 그것이 하얀 손잡이를 칠했다.
아스고어는 그 피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켜 버리고, 눈에 땀이 들어와도 눈을 감지 않았다. 먼지 한 톨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세탁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 않고 바로 손으로 잡아당겨 그 안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안에는 옷과 기계 부품이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방금 바깥에 나가 돌아오지 못한 경찰의 머리가 나란히 줄에 걸려있는 채로 말이다.
어느새 그 안을 파버린 것인지 할로윈의 잭 오 랜턴처럼 작게 빛나는 머리를 보고 경악한 표정을 아끼지 않는 아스고어는 바로 몸을 돌려 뒤에서 덮칠지도 모를 습격을 대비했다. 방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분명 어두운 밤에 들어왔을 땐 긴장감도 어떠한 망상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 집이니까 당연한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어둠에 익숙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숨을 쉬고 있는 시간 자체가 너무 무서웠다.
떨리는 가슴을 뒤로하고 이성을 잡아가며 이번에 베란다로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양쪽에 걸어놓은 커튼 뒤에 숨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고자 하는 과학자처럼 집중했다. 투명하지만 하필 그늘 속에 녹아버려 내부를 알 수 없어진 커튼에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워지고 있는 틈에 갑자기 옆에 세워두었던 마네킹들이 옆으로 무너지고 검은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달려 들었다.
아스고어는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눠 방아쇠를 당겼지만, 그것은 남아있는 팔 한쪽으로 총구를 잡고 위로 올려 총탄을 피하였다. 다음으로 강한 악력으로 쥐고 있던 총을 빼앗은 다음, 그것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코끼리의 코가 목을 조르는 감각에 아스고어는 폐에 산소를 주입할 수 없어지자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러나 생존의 본능에 잠깐 잡힌 바로 이성을 되찾고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잘려진 팔에 손을 갖다 대 쥐어짜기 시작했다.
절단된 팔에서 찌릿한 고통이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껴버린 ‘그’는 생전 경험하지 못한 감각이라 그런지 익숙하지 못해 금방 몸의 힘이 빠져 뒷걸음질하자, 그걸 노린 아스고어는 바로 단검을 꺼내 ‘그’에게 달려가며 휘둘렀다. 30cm 길이의 날은 달빛에 반짝이며 여린 살결을 베어버리기 위해 그의 손에 춤을 추게 되었다. 먼저 목을 향해 찌르려했지만, ‘놈’은 빠르게 목을 오른쪽으로 기울여 목숨을 부지시키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스고어는 몸을 빠르게 회전하면서 힘을 모아 발차기를 날렸다. 그의 발차기를 예상치 못해 그대로 복부를 딱딱한 자극에 느끼도록 열고 말았다. 도끼에 찍힌 나무처럼 무너지고 있는 ‘그’를 다시 한번 단검으로 그의 목을 관통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중심을 찾고 몸을 숙여 단검을 피했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를 향해 달려들어 덮쳤다. ‘그’의 돌진으로 등이 벽에 부딪힌 아스고어는 통증을 느낄 여유 따위 버리고 들고 있는 단검을 등 위에 박아 넣으려 했다. 날카로운 끝날이 살갗을 뚫기 전에 이미 ‘그’가 뒤로 물러서 내리치려는 손목을 잡았다. 손목이 잡힌 그는 어서 빨리 검은 손아귀에서 빼려 애를 쓰지만 하나밖에 남지 않는 손의 악력이 자유를 억제하였다.
손을 못 쓰게 된 그는 어서 빨리 내빼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단검을 쥔 손을 천천히 반대로 뒤틀려 다음 공격을 차단시키기 시작한 ‘그’의 동작에 탈출선을 찾기 시작했다. 완전히 비틀기 전에 쥐고 있던 단검을 놓아 아직 자유로운 손으로 잡아 허공에 가로선을 그렸다.
이번엔 공격이 통할 것이라 여겼지만 쥐새끼마냥 또 피해버린 ‘그’는 바로 제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아 뒤에 있던 벽으로 크게 박았다. 뒷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은 아스고어는 잠깐의 신음을 토하며 정신을 차리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옆에 있는 옷장 벽에 머리를 또 강하게 치고 베란다로 던졌다.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가 베란다로 날아가 난간에 부딪치자 바로 몸을 움직이는 ‘그’는 마무리를 내려 했다.
하지만 아스고어는 최후까지 죽지 않기 위해 몸을 일으켰지만, 다음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그’에게 목이 잡혔다.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자 위기를 느낀 그는 두 손으로 두툼한 손가락을 떼놓기 위해 애를 써 먹어보지만, 이제 별 효력을 보지 못했다. 사냥감이 발버둥치는 게 어지간히 귀찮은지 ‘그’는 베란다 밖으로 던져버렸다. 완전히 힘을 빼게 하여 마무리를 끝내려던 것이다.
힘없이 붙잡힌 아스고어는 결국 2층 베란다에서 무색히 떨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튼튼한 몸일지라도 만신창이가 된 지금이라면 결국 무사하지 못하나, 불행 중 다행히 밑에 있는 보일러 지붕에 떨어져 충격을 줄여졌다. 그렇지만 한 번 굴리면서 떨어졌기에 과연 괜찮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밑에 떨어진 아스고어는 잠시 몸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주지만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스고어가 정신을 잃을 것을 본 ‘그’는 이제 다시 밑층으로 내려가 찾아가려 했으나 어디선가 앳된 소리가 안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빠! 엄마!”
방금 떨어진 사냥감과 비슷하지만,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는 메아리가 들려오자 ‘그’는 새로 들어온 어린 사냥감의 소리가 들려온 곳을 한 번 흩어보고 다시 밑을 내려다 보았다. 먼저 그를 죽일지, 새로 들어온 사냥감을 죽일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밑에 있어야 할 큰 사냥감은 온데간데 사라졌다. 사냥감이 사라져버렸으나 당황한 기색을 갖추지 않는 ‘그’는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투로 다시 몸을 돌려 미련을 버렸다. 어차피 새로운 사냥감이 찾아왔으니 말이다.
‘놈’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지만, 이미 반 폐허가 되어버린 집을 보자마자 경악하며 달려온 두 아이들. 제때 도착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자 다시 공포에 감싸고 만 둘은 조심히 발을 움직여 무너진 현관 속에 들어갔다. 벽돌과 먼지 투성이 거실 바닥에 누군가의 팔로 보이는 고깃덩어리와 피가 보이자 아스리엘은 더 이상 이성을 유지할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찾기 시작했다.
“아빠! 엄마!”
있는 힘껏 부르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소년은 눈물을 삼키지 못하고 토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죽고 자신 혼자 남아있다는 공포가 곧 다칠지도 모를 죽음보다 더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감동적인 효심에 보답한 듯 주방에서 태엽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와, 거실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싱크대가 옆으로 움직이는 걸 보고 아스리엘은 주변에 흩어진 나무막대를 주워 방어 태세를 잡았다.
싱크대가 옆으로 움직이자마자 보고 싶었던 얼굴이 나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어서 둘 다 이쪽으로 들어오렴, 빨리!”
“엄마?!”
아스리엘와 프리스크는 싱크대 밑에서 토리엘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는 한편으로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달려갔다. 아스리엘은 반가움에 무사히 있었던 어미를 안기려 하나, 그녀는 그런 시간이 없다고 꾸지람 부리는 듯 거칠게 아들의 손을 잡아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두 아이들이 계단 밑으로 내려가자마자 그녀는 바로 버튼을 눌러 다시 싱크대로 막아놓았다. 얼떨결에 지하로 내려온 둘은 안에 다리가 부러진 샌즈를 보고 놀라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는지 눈을 감으며 신음을 뱉고 있었다.
“샌즈 형? 형, 다리가 왜 이렇게?”
친구가 다친 거 보고 바로 근심을 표하기도 전에 위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오자 침묵하였다. 무게가 상당하다고 증명하는 듯 발걸음 칠 때마다 천장이 꼭 눌러지고 있었다. 지하에 있는 모두는 말을 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기억을 안 할 수가 없을 발자국의 주인이 위에 있다는 것은.
‘아스고어....’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결국 모래성처럼 처참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천장 넘어서 있는 ‘그’는 싱크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먼지가 자옥한 주방 바닥에 발자국이 찍히다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허공으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하지만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을 때, 자신이 차를 끌고 달려 들어올 때 잠깐 스쳐보았던 싱크대를 기억해냈다. 약간의 벽돌과 먼지가 쌓여있었던 싱크대 위에 있어야 할 것이 바닥에 떨어졌음을 관찰하여 곧 그 밑에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있음을 인지하였다.
‘그’는 바로 몸을 움직여 싱크대를 떼놓기 위해 몸소 나서기 시작했다. 한 손밖에 남지 못했으나 상당한 무게가 나가는 짐을 드는 건 문제가 없었다. 천천히 싱크대 마루를 잡아 위로 올리자 고정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최후의 방어선이 악마에게 뜯겨가고 있어 위기를 느낀 지하의 쥐새끼들은 안절부절하며 위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몸을 떨고 있었던 아스리엘은 자신이라도 미끼가 되어 죽는 한이 있어도 맞서 싸울 무기를 찾다 옷장에서 아주 익숙한 무언가를 보았다. 색연필로 자신의 이름을 삐적삐적 적은 저격총. 아스리엘은 그것을 잠시 바라보며 옛적의 딱딱한 추억을 기억해냈다. 어떤 형태로 다칠지도 모를 위기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선 모든 무기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부친의 고된 훈련. 그는 그 때의 감각을 두 손에 상기시키며 옷장에서 총을 꺼내었다.
옷장에 총을 꺼내는 아들의 행위에 잠시 놀란 토리엘은 잘못 겨냥해 다치는 것을 우려해 곧장 말리려 했지만, 아스리엘은 오히려 제게 달려든 어미를 뒤로 밀어내고 계단 앞으로 걸어갔다. 서둘러 저격총의 상태를 확인하고 바로 장전을 하며 제 눈을 망원경에 기대어 곧 열릴 문으로 가리켰다. 제 손에 무기가 있으니 가슴 한 곁이 진정된 것 같았다.
150kg에 가까운 싱크대는 결국 옆으로 미끄럽게 무너지고 있자 아스리엘은 물론 모두가 흠칫 놀라며 위를 바라보았다. 싱크대는 무너졌지만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상상만으로 충분히 겁을 먹어 고립된 토끼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요한 공포가 천천히 모두를 전염시키고 있으니, 저격총에 의지하고 있는 그는 결국 모든 걸 자포자기했는지 눈물을 흘려가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호소를 토했다.
“아빠! 도와주세요!!”
이미 머릿속에 찢어지고 있는 고통이 섞인 어린 목소리가 계단 위를 타고 울려 퍼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소년은 계속 입을 열어갔다.
“죄송해요! 저 못하겠어요!! 정말 죄송해요, 이제 정말 못하겠어요!”
친구의 처절한 호소에 한 가닥 남은 이성을 잡고 있었던 프리스크도 결국 눈물을 흘리며 입을 부여잡았다. 이제 정말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라는 가능성에 매달리고 기도했지만 돌아오는 건 절망뿐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이 실체화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잡았다.”
언제 그래냐는 듯 금방 울음을 그쳐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냉정한 눈빛을 ‘그’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걸고 있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귀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총탄이 ‘그’의 목덜미 근처를 꿰뚫고 지나가 사라졌다. 목을 맞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최악의 피해를 안겼다. 뜨거운 총탄의 반동으로 ‘그’가 무너지자 어두운 거실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스고어.
“Enjoying The Halloween, Boogiemen.”
작게 속삭이며 바로 날카로운 작살을 다리에 꽂아버린 아스고어의 공격으로 ‘그’는 갈팡질팡하였다. 아직 총탄의 반동을 이기지 못했는데 연이어 공격을 당하자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어 서서히 썩어문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당하지 만을 않을 것인지 ‘그’는 얼마 남지 않는 힘을 일으켜 반격을 가했다.
다른 다리로 그의 무릎을 공격해 중심을 벗어나도록 하고 재빨리 일어나 뽑았다. 작살의 날이 살 뿐만 아니라 뼈까지 베어버려 힘을 주기만 하면 타오르는 것 같이 괴로웠으나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스고어는 망신창이가 되어버려도 계속 움직이는 ‘그’를 보며 ‘부기맨’이 아니라 ‘좀비’가 아닌지 실소했다. 피가 묻은 작살을 뽑아 이번에 자신을 꽂기 위해 다가오는 ‘그’ 몰래 뒤에서 나무판자를 주워 얼굴을 올려 쳤다. 빠르게 뺨을 치는 다음에 턱도 공격해버리자 잠시 정신을 잃은 건지 그만 지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상당한 무게를 가져서인지 나무로 만든 계단이 금이 가버렸고, ‘그’가 지하에 떨어져 버리자마자 바로 얼굴을 드러내며 입을 여는 아스고어.
“어서 나오게!! 곧 다시 일어날 거야!!!”
그의 경고가 끝마치자 바로 침대에 누워있는 샌즈를 부축하는 파피루스와 토리엘, 처음으로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것에 총을 쏴버려 다리에 힘이 빠진 아스리엘를 일으켜 나가려는 프리스크 모두가 계단으로 향해 뛰어갔다. 부상을 입은 스켈레톤을 먼저 위로 보내는 다음에 뒤따라 올라가기 위해 아이들이 계단을 밟자 바로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아이들은 고개를 돌려 확인을 하자마자 식겁해져 그만 금이 간 계단을 보지 못하고 다리를 성급히 움직였다. 아주 당연하게도 아스리엘이 발을 내던지자마자 바로 부서지고 말아 넘어지게 되었고, 프리스크는 서둘러 친구를 일으키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의 발을 잡아버려 잡아당기자 비명을 지르는 아스리엘. 프리스크는 같이 끌려가는 것을 각오하고 바로 친구의 팔을 잡으며 버티고 있었다. 곧이어 부상자를 내려놓고 서둘러 프리스크의 어깨를 잡아 다 같이 힘을 합쳐 소년을 구출하려 했다. 그러나 여러 명이 힘을 합쳐도 전혀 발전이 보이지 않고 점점 밑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에 자신이 가망이 없다고 느낀 아스리엘은 프리스크의 눈을 마주 보며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프리스크는 그 눈빛이 무엇인지 짐작했는지 고개를 흔들어 강하게 부정하며 더더욱 잡고있는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자신을 포기하라는 소꿉친구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끌어올리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이미 아스리엘은 체념한 듯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둘이 서로를 마주 보는 사이 ‘그’는 이제 발을 잡기만 하는 것이 아닌 몸을 일으켜 더 강하게 당기려고 하자, 그걸 지켜본 토리엘은 잠시 손을 떼어 제가 매고 있던 가방 지퍼를 열었다.
서둘러 무언가를 확인하고 꺼내며 뒤집다가 곧 작은 상자가 보이자 화색을 드러내고는 안에 있는 모든 내용물을 힘껏 ‘그’에게 던졌다. 유리로 이루어진 약병들은 곧 ‘그’의 얼굴에 부딪혀 깨졌고, 그 안에 보관되어있던 내용물이 가면의 눈구멍 안으로 들어가 눈과 피부에 스며들자 곧 괴로운지 발을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 약병이 던져지는 걸 보지 못한 프리스크는 갑자기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에 당황하나, 정신을 차려 바로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쳤다.
가냘프지만 의외로 힘이 강해 약해진 그를 쳐내기에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처음으로 프리스크가 누군가를 때리는 걸 보게 된 아스리엘은 벙하였지만, 부모의 다급한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뭐하는 거냐! 어서 올라와라. 빨리!!!”
언제 마음을 공유하는 것마냥 똑같은 말을 내뱉는 부부의 지시에 두 아이들은 서둘러 계단 위로 올라갔다. 각각 용도가 달라도 전부 치료에 사용되었던 약물들이 섞이고 섞여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어진 독으로 변해 눈이 타들어가고 있음에도 끝까지 사냥감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닥에 손을 대가며 움직이지만 때는 늦고 말았다.
다시 주방으로 올라간 아스리엘이 지하 대피소 계단 밑에 있는 막대를 잡아 당겨 옆으로 돌려 누르자 갑자기 입구의 양쪽에 날카로운 칼이 튀어나와 문을 막아버렸다. 녹이 타고 말았지만, 두께가 두껍고 딱딱한 나무를 뚫고 나오는 날카로움은 여전해 완벽히 입구를 차단되었다.
칼날로 막혀진 입구를 지켜본 프리스크는 놀란 듯 가만히 서있다가 그가 일어서서 설명해주었다.
“프리스크, 우리가 있던 곳은 단순히 숨기 위한 곳이 아니야. ‘놈’을 가두기 위한 함정이었어.”
훈련받았을 적, 자신이 사격 연습을 할 때 아스고어가 다가와 어떤 설계도를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을 때를 떠올렸다. 공사를 진행하기 전에 집을 떠나고 말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매번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었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도 역시 속여야 뒤탈 없이 안전해질 수 있다는 말이 괜히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들이 지하를 막아버리는 사이, 아스고어는 주방 선반 안에 있는 식료품들을 치워 조금만한 레버를 찾고 당겼다. 그러자 곳곳에 무언가 새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실 뿐만이 아니었다. 방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호스로 통해 투명한 가스를 분비하고 있었다.
레버를 당기고 다시 옆 선반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걸 가지고 다시 지하로 돌아온 아스고어는 지금 눈이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그’를 보았다. 곳곳에 드러나 있는 상처와 절단된 어깨 그리고 실명되어버린 눈. 꼴이 정말 엉망이었다. 그리고 그걸 반드시 보고 싶었던 아스고어였다.
실실 웃으면서 선반에서 꺼내온 박스 안에 손을 집어넣어 조명탄을 집었다. 비록 벽이 무너져 가스가 새고 있겠지만, 최소한 지하는 새까맣게 타버릴 것을 분명하였기에 안심하는 아스고어는 조명탄을 잡아당기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망설이는지 떨고 있었다.
막상 그를 죽이기 위해 집을 개조하고 온갖 무기로 채워버리고 말았지만, 한땐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살았던 추억이 담긴 집이었다. 둘이 자신의 곁을 떠났을 때, 그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해주었던 건 이 집이었다. 하나하나 행복했던 추억이 묻어있는 이 공간을 감히 무심히 둘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가 눈에 비치는 이 장소에 있었던 추억이 일렁거리니 굳셌던 눈이 흔들려 오랫동안 간절하던 이 순간을 망설이고 말았다. 하지만.
“고리, 전 당신의 곁에 있어요.”
“아빠, 이젠 두 번 다시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함께 조명탄을 집은 손을 잡으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음을 눈치채어 흔들리지 말라는 의지가 눈에 반짝이고 있었다.
“집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에요. 앞으로의 시간도 많아요.”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대략 이해한 아스고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미소를 지었다. 결심을 굳혔다는 뜻으로 집고 있던 조명탄을 잡아당겨 불을 피웠다. 그리고 제 안에 담아놓았던 상처를 이제 놓겠다는 식으로 던져버렸다. 정말로 긴 시간이었다.
조명탄이 지하에 떨어지자마자 안을 채우고 있었던 가스가 불타오르기 시작해 그 좁은 공간을 풍만하게 태우고 있었다. 폭발하는 불꽃이 ‘그’를 덮쳐 타오르는 것을 본 아스고어는 힘이 빠지는지 스르륵 넘어지자 토리엘와 아스리엘 그리고 프리스크가 부축하고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갔다. 불에 뒤집어졌어도 비명도 움직이지도 않는 ‘그’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내와의 얼굴을 마주보며 바깥으로 나갔다. 소중한 이들이 곁에 있으니 말이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멀리 경찰차와 구급차가 급히 오고 있자 부부와 파피루스는 두 아이들을 보내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도록 부탁했다. 어른들의 말에 아이들은 바로 다리를 움직여 차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자 바로 서로를 마주보는 부부.
“당신.... 아까 몰랐는데 당신 근육이 이렇게 많을 줄을 몰랐네요.”
“후훗.... 나중에 시간이 남는다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소.”
“정말, 변태라니깐 당신은.”
“하지만 당신이 보고 싶다는 투로 얘기했잖소? 피차일반이오, 허허”
남들이 듣기에 느끼한 대화이지만 한 단어마다 진한 사랑이 묻어져 나오고 있어 사랑에 익숙한 이들에겐 충분히 공감이 가기도 했다. 그렇게 이마를 마주치고 코를 비비며 서로의 애정을 과시하는 부부는 드디어 다시 하나로 돌아왔다. 원래대로 있어야 할 옆자리가 다시 채워졌다.
한편 경찰차로 달려가 다친 이들이 있음을 알린 아이들은 차에서 내린 경찰의 인도를 받으며 차에 타고 있었다. 차에 탑승한 아스리엘은 고개를 뒤로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리스크는 마음 편히 쉬지 않았다. 오히려 아스리엘을 나무라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한 친구를 보고 놀란 그는 두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 너는 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려 했냐며 아스리엘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아 그게.... 나 때문에 누가 죽는다면.... 그게 죽은 나한테도 상처가 될 것 같아서.... 그래도 지금은 모두가 다 살아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화를 내지 마.”
* 너는 아무리 일이 좋게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스스로를 희생하면 남은 이들은 어떻게 하라는 셈이냐며 계속 몰아가지만 점차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계속 꾸짖었던 프리스크가 울기 시작하자 당황한 아스리엘은 어찌할 줄 몰라 진땀을 빼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우선 닦아야 한다고 생각해 주머니에 손수건을 꺼내 갖다대려 했으나 하필 언덕이 지나가는 바람에 제 품에 안기고 말았다. 의도치 않게 품속에 들어가고 만 프리스크는 활들짝 놀라 금방 빠져나와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아스리엘 역시 품속에 남아있는 따뜻함에 잠깐 감상에 빠지고 말나 이내 정신을 차려 고개를 돌린 프리스크를 쳐다보았다.
매우 놀랐는지 절대 얼굴을 마주치려 하지 않으니 그의 눈에 마치 새끼 고양이가 삐진 것으로 보여 귀엽게 보이고 말았다. 콕콕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아스리엘은 천천히 다가가 입을 열었다.
“프리스크, 그렇게까지 날 소중히 생각한 거야? 내가 죽으면 많이 슬퍼할 정도로?”
아스리엘의 돌직구에 프리스크는 다시 한번 더 놀라 얼굴이 붉게 물들어져 놀라자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어떻게 보면 제 마음을 이미 들키거나 다름없어서 입이 굳어지고 말았다. 어찌할 줄 몰라하는 친구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는 아스리엘. 비극이 함께 했으나 이제 막이 내리고 희극이 올라오는 밤이었기에 겨우 웃고 떠들 수 있게 되었다. 부부와 똑같이 아이들은 오랜만에 그리고 예전처럼 웃고 행복하게 떠들썩거렸다. 드디어 모두가 해피 엔딩을 맞이한 게 아니더라도 같은 상처를 같이 짊어 살아가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 드디어 끝을 마쳤네요...... 이제 대학 졸업반이라 더 못 쓰기 전에 빨리 끝내고 싶었는데 시간 문제로 인해 질질 끌고 말았네요.... 많이 부족한 글이었지만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었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