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처럼 같이 바람이 부어 마른 잎사귀가 돌아다니는 소리는 빼고 고요한 대학교. 그곳은 고단스러운 시험이 끝났음에도 보충 수업이 남아있어 많은 이들을 고문같은 지루함에 빠트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교수의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마지막이 아닌 연설을 자장가로 삼아 꿈나라로 떠나가는 시점에 한 젊은 학생은 여전히 눈빛이 반짝거리며 그걸 메모하고 있었다.
전 학기 우수 장학생에 졸업을 앞두고 있는 착실한 젊은 백색의 사내는 주변 학우들의 코 고는 소리에 집중을 흩트리지 않고 끊임없이 메모하며 중요한 부분을 체크하며 마무리에 다다르러 간다. 교수의 진짜 마지막에 사내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메모에 손을 갖다 대려는 차에 갑자기 뭔가 부드러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분명 저를 지켜보는 익숙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가며 그 근원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강의실 안엔 없었다. 모두가 교수의 자장가에 푹 빠져 아무도 저를 지켜보는 시선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잘못 느꼈나 싶어 다시 메모지에 시선을 고정시키려다 빛이 들어오는 창문에 눈을 부셔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모두가 자고 있고 부탁을 들어줄 상태가 아니니 직접 제가 커튼을 치기로 해 자리에 조용히 일어나 창문 앞에 걸어간 사내는 잠시 그 바깥을 보고 반가움에 어린 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천천히 동면을 준비 중인 나무 옆에 방금까지 없었던 자신의 친아버지가 저를 보며 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보고 싶은 친부가 찾아오니 무척 반가워진 사내는 자신도 역시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려다 강의가 끝났다는 종이 울려 퍼지자 잠에서 깬 학생들은 언제 그랬냐는 눈빛으로 반짝이며 금세 가방을 챙겨 나가기 시작했다. 사내도 역시 가방과 메모지를 챙겨 밖으로 나가 언제나 같은 나무 밑에 기다리는 친부에게 달려가고자 학과 건물에 나왔다.
건물 입구에서 아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눈웃음을 짓는 아스고어는 무척 반가워하며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하지만 천천히 걸어가는 그와 다르게 친부를 빨리 보고 싶어 달려온 사내의 발걸음에 금방 둘은 가깝게 마주 보았다.
“언제 오셨어요, 아빠? 연락이라도 미리 해주시지. 그러면 제가 맛있는 식당으로 안내해줄 텐데.”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단다. 방금 도착했으니 염려마렴, 아스리엘. 그냥 이렇게 얼굴만 보아도 좋으니깐 말이다.”
“그래도 서로 맛있는 거 먹으면서 보면 더더욱 좋잖아요. 그러지 못하면 너무 아쉬운데. 앗, 그럼 가까운 카페에 가지 않으래요? 마침 여기 가까운 곳에 새로 생긴 카페가 있어요.”
“그러니? 나야 좋지. 범생이 줄 알았는데 은근 그런데 잘 찾는구나, 우리 아들은.”
“제가 매번 공부만 하는 게 아니니까요. 저도 사람이고 괴물이에요, 아빠.”
간만에 만나 무척 들뜬 두 사람은 그렇게 아들이 알려준 카페까지 걸어가기 시작하며 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언제 그렇듯 똑같은 주제였지만 둘은 전혀 괘념치 않고 즐겁게 말을 나누고 그랬다.
“그래, 이제 졸업 시험만 마치면 다 끝나는구나. 이미 면접도 합격 소식으로 왔으니 나중에 졸업하면 바로 취직을 할 수 있고, 정말 대단하네, 우리 아들은.”
“아니에요, 전 그냥 열심히 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그 노력의 결과가 온 거뿐이죠.”
“아니지, 네가 똑똑한 건 다 네 엄마를 닮아서지. 그녀는 얼마나 똑똑한 데. 그래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거고.”
“제가 똑똑한 건 엄마만이 아닌 아빠도 닮아서죠. 아빠도 지식에 특화된 엄마보다 지혜가 깊잖아요.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걸 이용한 지혜가 필요하는 법이니까요.”
“후훗. 그렇게 얘기해주니 고맙구나, 아스리엘. 덕분에 아들 자랑이 더 늘어나는 것 같구나.”
“헤헤, 아빤 제 자랑을 하신다면 전 엄마하고 아빠 자랑을 해야 겠네요. 똑똑한 두 분이 있어서 제가 이렇게 똑똑하게 태어났으니까요.”
“허허. 말은 참 예쁘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내일 저녁에 외식한다고 했던가? 딱 면접 합격 받은 날에 100일이구나.”
“네, 제가 합격 통보를 받으니 엄마가 너무 좋아하셔서 당장 예약을 잡아더라고요. 예약한 곳이 꽤 자리 잡기 힘든 곳인데 용케 해냈다니깐요.”
“그렇지, 그래서 내가 네 엄마가 똑똑하다고 한 거잖니.”
발걸음을 움직이며 언제나 똑같은 학교 얘기와 가족 얘기뿐인 부자. 그럼에도 그 어느 주제보다도 더 즐거운 법이었다. 아들이 말한 카페가 보이기 시작하니 곧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내고자 주머니에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받으렴. 내가 이곳에 온 건 다름아닌 이걸 주고 싶어서다.”
새하얀 봉투가 자신한테 딱 보자 바로 호기심을 품은 아스리엘은 곧 두손을 올려 그것을 조심히 받았다. 봉투 주제에 무게가 은근 무겁고 손가락에 두둑한 느낌을 줘 더더욱 확인하고 싶어진 그는 곧 봉투 입구를 뜯어 그 안의 내용을 보았다. 그리고 곧 놀란 눈빛이 되어 고개를 돌려 그것을 돌려주려 했다.
“이 돈은 저에게 필요 없어요, 아빠. 이거 너무 많아요.”
“아니다, 괜찮으니 그냥 받으렴. 이제 시험도 다 끝나고 고생했을 텐데 용돈을 줘야지. 아니면 그걸로 내일 계산하면 되다니.”
“하지만 아빠, 이거 제게 부담을 줘요. 이렇게 많으면 아빠한테 너무 미안해서 받기가 힘든데....”
너무 미안해하는 아들의 말에 상냥히 웃으며 부담감을 풀어주려고 시선을 마주친 아스고어. 하지만 이제 성인임에도 여전히 어린 아이들처럼 맑고 순수한 눈빛에 곧 죽어가는 아이들이 생각나 버린 그는 곧 짧은 신음과 함께 트라우마가 일어나 절로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냥 부담을 품지 말고 받아주면 안 되겠니? 아빤.... 너하고 엄마에게 너무 미안해서 말이다. 아빤 네가 어릴 적에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해주지 못해서 그게 너무 미안하고 괴로웠다. 나 때문에 모두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다니? 이렇게라도.... 너에게 아빠로서 해주고 싶은 거 다 해주고 싶단다....”
이젠 아들과 있으면 떠오르지 않을 거란 생각했던 그 날의 아픔이 서서히 차올라 숨을 헐덕거리는 아스고어. 그는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마치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처럼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대로 중심을 잊기 시작했다. 사내의 상태가 왜인지 점점 심각해져 가는 것이 본 아들은 그가 발작이 일어났다는 것을 파악하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변해갔다.
“아빠....?”
“...미.. 미안하구나 아스리엘. 카페는 다.. 다음... 다음에 가도록 하마. 아빤... 지금 몸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나중에 연락하마....”
가슴 한쪽에서 지금 선선한 바람으로 식혀진 학교 공원도 뜨겁게 달굴 감정을 세어 나오지 못하게 계속해서 집어삼키며 주차장으로 뛰어가는 아스고어의 뒷모습에 걱정과 근심을 눈으로 표출하는 아스리엘. 그는 오랜 상처로 아직 괴로워하는 것을, 저에게 또 상처를 주는 것을 두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또 자신의 친모조차 모르지 않기에 위로가 될지도 모르나 해야 할 말을 하기로 했다.
“아빠! 엄마는.... 엄마는 아빠와 다시 함께 살고 싶어 해요! 엄만 아빠의 상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어요! 그리고 같이 아빠의 상처를 이겨내서 예전처럼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해요. 그러니 아빠, 저흰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 부디 꼭 찾아와 주세요!”
사라져가는 아비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에 설린 아스리엘은 언제나 그가 자유롭게 벗어나 행복을 찾아가기를 간절했다. 어린 시절을 떠오르면 그는 언제나 불안과 걱정 그리고 자유를 갈망하던 모습을 상기하였다. 언제가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공포로 자신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매번 무술 훈련과 육군 사관학교에 배운 기술도 함께 가르치곤 했다. 그래서 이에 분노한 자신의 모친이 저를 데리고 집에 나가버린 것이고 친부는 그렇게 혼자 살아가게 된 것이었다.
그날에 대해서는 그를 원망한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제가 느꼈던 공포를 아들이 이겨내어 자신과 똑같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직접 겪은 건 아니었지만, 옛 신문과 오랫동안 보았던 그 모습을 보고 자라 당연스럽게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렇기에 저를 한 번 보고 미안해하는 눈빛의 그에겐 연민과 이해만이 남을 뿐이었다. 반드시 그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맑은 공기가 먼지에 오염될 정도로 거칠게 운전해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재빨리 집에 달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주방에서 창고로 이어지는 문 옆에 설치된 버튼을 누르자 갑자기 주방 한 가운데에 서 있는 탁자가 태엽 소리와 함께 옆으로 옮겨졌다. 자옥한 어둠이 모여있는 지하 속으로 거친 발걸음 소리를 내면서 안으로 들어간 그는 지하 바닥에 도착해 계단 옆에 있는 조명 줄을 잡아 환하게 비치게 해 내부를 잘 보이도록 했다.
조명이 커져 방안을 보이게 되자 곧바로 장롱에 걸어가 활짝 열어 빛바랜 저격총과 탄약을 가지고 다시 주방 위로 올라가 지하를 다시 탁자로 닫았다. 제대로 닫은 것을 확인해 바로 창고로 나가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 집과 완전 다른 분위기로 가득한 곳으로 다다랐다.
무언가 깨진 파편이 길거리에 가득하고 신체 일부가 깨진 오래된 인간 그리고 괴물들의 마네킹 그리고 나뭇가지와 울타리에 지워지지 않는 화약 냄새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아스고어는 지금 손이 매우 떨리고 거친 상태임에도 흔들리지 않고 부드럽게 저격총에 탄약을 장전하고 바로 멀쩡한 마네킹을 향해 사격하였다. 숲속을 빠르게 덮을 폭발 소리와 함께 저격총 총구에 무엇이든 바로 꿰뚫어 버릴 총탄이 마네킹 머리를 뚫어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사라져 버렸다.
마네킹이 명중했음을 보고 바로 다른 마네킹에 저격해 사격하는 아스고어. 마네킹을 하나하나 부숴가는 그는 세상이 어둡게 변해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단 한 가지만이 보였었다. 그날 어둠 속에서 숨어 제가 돌보고 있던 어린 아이들을 무참히 죽여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 더럽고 추악한 살인마. 가면 속에 저를 망가트리고 모두의 꿈을 사라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는 그놈의 시선.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잊을 리가 없었다. 그 눈빛 때문에 저는 정상적인 삶에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탕!!
이번에도 단 몇 초 만에 마네킹의 머리를 전부 명중시킨 아스고어. 그는 뭔가 마음의 안식을 얻었는지 겨우 손떨림이 멈추고 뜨거웠던 숨결이 식혀졌다. 아니, 그는 안식을 다시 얻은 것이 아닌 그저 가슴 속에 피워 오르던 공포와 분노를 모두 표출한 것이었다.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분노에 밤마다 덜덜 떨며 괴로워하던 그 공포는 생각지도 못하게 나타나 자신을 괴롭혔다.
억울했었다. 제가 왜 무슨 잘못으로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그 순수한 아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운이 없었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살아남았지만 그날의 아픔을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고 매일매일 지옥에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이 기분을 알 리가 없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모두 가벼이 벗어던지라며 위로를 하지만 그 따위 말에 귀담아듣지를 않았다.
한 명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쉽게 잊으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귀에서 들리는데 어찌 잊어버리라 말인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을 내뱉는 그들이 너무 미웠고 절로 정이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가 자신의 상처를 이해하고 받아주어 위로를 해주었으면 했었다. 그날엔 어쩔 수 없었다고, 넌 최선을 다한 것이라며 위로를 해주며 상처를 치료해주는 그런 깊은 마음의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아스고어는 제 안에 자라난 분노를 모두 꺼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찾아오는 공허감에 어찌할 줄 몰라 이제 비어버린 총을 바닥에 툭 던져버리며 털썩 앉았다. 무섭다. 지금 ‘그’가 30년째 갇혀 지내고 이젠 먼 곳으로 이감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두려웠다. 눈을 감기만 해도 금방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제 목을 칼로 그어버릴 것을 생각하면 숨이 진정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찾아가 죽이고 싶어도 경계가 너무 삼엄해 쉽게 접근할 수 없었고, 막상 만나더라도 그날의 공포가 다시 되살아나 아무것도 못 할까 봐 선 듯 마음이 앞서지 못했다.
화약 냄새가 자옥한 흙바닥을 커다란 손으로 크게 내리치며 다시 한 번 불안에 떨기 시작하는 아스고어는 무릎을 모아 한 몸처럼 감싸 따뜻하게 만들었다. 부들부들, 상냥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살인과 함께 찾아온 소나기의 차가움을 상기시켜 주었다. 억울함과 자괴감에 흘리는 눈물도 이젠 눈이 나올 것같이 아팠다. 누가 제발 이런 망가진 자신을 일으켜 주기를 바라며, 제 오랜 상처를 이겨낼 수 있도록 응원해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걸 자신이 망가트렸기에 환상에 불과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사격장 가운데에 절규를 토해냈다. 그 절규는 그가 여태 쌓아온 고통과 공포 그리고 분노가 겹치고 겹친 딜레마이자 맹세이며 기도였다. 하늘에 있는 누군가에게 제발 자신을 구원받게 해달라는 일말의 신호를.